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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샤쓰 그 신후 May 23. 2021

밀리터리 장르소설) 무토 - 인간, 병기

1부 - 챕터# 11. 정혜는 병기의부적 주머니를떠올렸다.

    성병 검사를  끝낸 여성들이 지대 천막을 나서니 정글에는 이미 어둠이 내려앉는 중이었다. 정혜는 빽빽할만치 검기만 한 정글의 어둠에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음산함을 느꼈다. 

    모든 게 처음이었다. 기차 화물칸에서의 첫날 밤도, 정글에서의 두 번째 밤도. 세 번째 밤에는 또 무엇이 처음일지에 대해선 정혜는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오직 병기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만 생각하고픈 마음뿐이었다. 

    여성들을 천막에서 끌고 나온 경계병들이 안내한 곳은 우물이 있는 천막이었다. 이들은 칫솔을 차례로 나눠주고는 씻으라고 했다. 여성들이 끈적한 땀을 대충이나마 닦아내자 비로소 판잣집으로 안내되었다. 각자 좁은 방을 배정받은 여성들은 삼일 동안 뚝딱 만들어진 그 판잣집이 내일이면 위안소로 바뀔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여성들은 그저 버마에 온 지 이틀 만에야 비로소 등을 눕힐 공간이 생겼다는 데에  조금이나마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정혜가 방문 대신 설치한 가림막 천을 들추니 펼쳐진 모포가 먼저 눈에 띄었다. 방구석에는 배식을 받을 용도로 보이는 반합 통과 찌그러진 물통, 숟가락 하나가 놓여 있었다.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옆 방의 나이 어린 소녀가 내는 소리였다. 정혜 자신도 그러하건대 불과 16, 17 살의 소녀들은 얼마나 무섭고 불안할까... 그 심정이 십분 백분 이해되고도 남았다. 불안감은 전염병처럼 정혜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정혜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럴수록 방법을 찾아야 했다. 


    병기를 어떻게 찾을 지만 생각해! 


    병기는 고향 땅에서 나무를 베고 목수일을 할 때도 까맸지만 이런 열대의 날씨라면 시커멓게 피부가 더 탔을 것이다. 아마 외모도 달라졌겠지. 정혜는 군인이 되면 고된 훈련으로 얼굴색이나 눈빛이 달라진다는 말을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생사를 오가는 무시무시한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의 경우 부모라 하더라도 쉬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라 했다. 이역만리까지 와서 음식도 달랐을 것이고, 병기가 군복 입은 모습을 한 번도 보지 않았기에 정혜의 눈에 무언가 낯설어 보일 수도 있었다. 

    정혜는 부적 주머니를 떠올렸다. 그 주머니에는 부적 자수와 정혜의 흑백사진, 염주가 들어있었다. 부적 자수는 병기의 무사귀환을 기도하며 정혜가 직접 수놓은 것이었고, 염주는 영험하기로 소문난 기선암 스님한테 허구한 날 매달려서 겨우 얻은 거였다. 병기가 떠나는 전날, 정혜는 손수 만든 부적 주머니를 병기의 목에 걸어주면서 말했다. 

    "내일부터는 이게 나야. 내가 널 지키는 거라고. 그러니까 이 거 절대 몸에서 떼면 안 돼. 알겠지? 꼭이다."

    그 군인이 진짜 병기라면 분명히 부적을 가지고 있을 터였다. 문제는 그 남자를 어떻게 찾아내느냐였다. 그러다가 아까 지대에서 병기 이름을 물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한번 밀물처럼 밀려든 그 후회는 점점 거대한 파도가 되어 정혜를 더한 추측과 상상에 빠지게 만들었다. 

    이때 판잣집 입구에서 양철통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배식이다. 전부 반합 통을 꺼내놔라."

    일본어를 알아들은 여성들이 옆방에서 옆방으로 소곤대는 말소리가 들렸다. 정혜도 가림막 아래로 반합을 내밀었다. 복도에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한동안 이어졌고, 잠시 뒤 정혜의 문 가림막에도 취사병의 국자가 보였다. 국밥 같은 음식이 반합 통에 쏟아졌다. 정혜가 반합 통을 되가져 오려는데 휙 하고 가림막이 걷혔다. 취사병의 음흉한 얼굴이 한동안 정혜를 빤히 들여다봤다. 놀란 정혜가 후다닥 엉덩이를 끌며 뒤로 물러났다. 

    "오 예쁜데? 어차피 장교 차지겠지만 말이야." 

    "무슨... 말입니까?"

    "너희는 위안부단이야." 

    "그게... 뭡니까?" 

    "내일이면 알아. 우리한테 천국이 열리는 거지." 

    정혜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취사병이 가림막 아래로 무언가를 밀어 넣었다. 

    "자 선물이야. 이게 널 도와줄지도 모르지." 

    그러고는 키득거리며 멀어져 갔다. 정혜가 조심스레 다가가 그 물건을 집어 들었다. 포장지에는 한자로 '突擊(돌격)'이라 적혀 있었고 촉감이 물컹거리는 이상한 물건이었다. 정혜는 이게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몰랐다. 그것이 콘돔이라 불린다는 것도, 어째서 도와준다는 건지도. 


    반합 통을 비우자 노곤함이 바로 스며들었다.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풀벌레가 우는 소리, 새의 울음 같은 소리가 계속 뒤섞여 들려왔다. 

    정혜는 오직 부적의 힘을 믿기로 했다. 이미 지대에서 결심을 결심을 굳힌 후였다. 

    병기이거나 죽음이거나. 

    정혜의 두 눈이 스르륵 감긴 건 불과 몇 초 뒤였다. 


    정혜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어디선가 날카로운 비명이 터졌기 때문이었다. 옆 방에서, 그리고 다른 몇몇 방에서 여성들이 비명을 질러대거나 악을 쓰는 울음소리가 빗발쳤다. 정혜는 재빨리 구석으로 가서 몸을 웅크렸다. 극도의 긴장이 덮쳐와 온 몸에 힘이 들어가며 뻣뻣해졌다. 정혜의 떨리는 눈은 오직 방문 가림막에만 꽂혀 있었다. 무엇이 나타날지 몰랐다.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도. 

    그때, 가마니로 덮은 칸막이 나무틀이 부서지면서 옆 방이 드러났다. 그 방의 앳된 소녀가 도망칠 곳을 찾다가 가림막을 밀어버린 것이다. 소녀 뒤로는 한 병사가 권총을 빼어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소녀는 곧바로 정혜 품으로 달려들었고, 그 순간 정혜의 방문 가림막도 휙 젖혀졌다. 병사 둘이 정혜 얼굴을 재빨리 훑어보았고 이내 고갯짓을 끄덕했다. 곧장 안으로 들어온 병사들은 정혜와 옆 방 소녀를 온 힘을 다해 끌었다. 정혜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나무 벽을 잡았다. 손톱이 빠져나갈 듯한 고통이 곧바로 덮쳐왔다. 병사가 정혜의 손목을 내려쳤다. 비명과 함께 정혜의 몸뚱이는 맥없이 끌려가기 시작했다. 

    밖에는 먼저 끌려 나온 예닐곱 명의 여성이 두려움에 떨어대며 대기하고 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다들 눈물, 콧물이 범벅이었다. 정혜와 옆방 소녀가 마지막으로 합류하자 병사들은 각각 한 명씩 여성들의 팔 한쪽을 결박하고 다시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정혜의 눈에 열대의 벌레 몇 마리가 흙바닥을 꾸물거리는 게 보였다. 지렁이 같기도 했지만 다리가 달려 있었다. 하필 이 순간 이상하게도 그 한 단어가 횃불처럼 머리에 박혔다. 


    성병.


    정혜가 넘어지는 척하며 두 손 가득 흙을 움켜쥐었다. 벌레가 손 안에서 꿈틀거렸다. 정혜는 머리칼이 곤두서는 징그러운 촉감을 느꼈지만 벌레가 죽지 않게 손 모양을 동그랗게 말았다. 정혜의 눈에 몰려나오는 사병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침 식사를 후다닥 끝낸 사병들이 위안소 앞에 줄을 서기 위해 몰려나온 것이다.

    "병기야! 병기야!" 

    정혜가 군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사병이 정혜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정혜와 여성들은 장교 숙소로 사용하는 사원 안으로 끌려갔다. 

    사병들이 여성들을 차례로 각 방에 집어넣었다. 네 번째 방문이 열리자 사병이 정혜의 등을 떠미었다. 그러고는 바로 탁! 문이 닫혔다. 정혜의 부들부들 떨리는 눈동자가 한 남자를 향했다. 장교복을 입은 그 남자는 등을 보인 채 햇살 가득한 창을 내다보고 있었다. 손 안의 벌레는 살기 위해 계속 기어 다녔다. 그러다가  피부를 깨무는 따끔함이 솟아올랐다. 정혜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장교가 돌아섰다. 역광으로 인해 얼굴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장교가 정혜를 향해 몇 발짝 다가왔다. 


    기무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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