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Human Report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oAh May 30. 2021

생명의 순환 .. 아기 아버지..


일요일 아침, 며칠동안 비 쏟아대더니 하늘이 며칠만에 맑다. 시골 아버지 집 옥상 마당에 나와 오랜만에 새소리를 들으며 커피와 흡연을 즐긴다. 눈뜨자 아침부터 거실에서 들려오는 TV소리가 참으로 반갑다.


수요일 부터 식음을 전폐하고 대소변을 못가리고 기저귀를 찬채 잠만 주무시던 아버지가 다시 혼자 거동을 하시고 정상 생활로 돌아 오셨다는 소리다. 아침 먹자는 소리도 반갑다.


음식에 집착이 과도해 집안에 홈쇼핑으로 미니마트를 차리시던 분이 화요일부터 갑자기 식사를 거부하고 대소변을 놓기 시작, 말도 못하시고 잠만 계속 주무셨다. 집안에서 모두 이제 보내드릴 때가 됐다고 생각해 어제 고모들이 모여 아버지를 모시고 가족 식사모임을 열었다.


4년전에 내가 시골에 요양가 있을때 지금같은 상황에서 어머니가 고모들한테 연락도 없이 요양원 모신 바람에 그 관계 후유증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때의 사태로 아버지도 요양원 이라면 경기를 하시고 두 집안이 원수처럼 됐는데 아직 앙금이 남아있다.


돌봐주시는 아주머니 오시지 말라 하고 나혼자 갓난아이 돌보듯 5일동안 하루 4-5개 아버지 똥기저귀를 갈아 드렸다. 집안에 나밖에는 할 사람이 없다. 부모의 엉덩이와 은밀한 부분을 닦아내는 일을 하면서 온갖 상념들에 젖는다. 과연 자식아닌 남들이 이런일을 제대로 해줄수 있을까..



질병을 앓는 고령 노인들의 삶과 죽음은 종이 한장 차이다. 말 한마디에도 서운하다 생각하면 죽음을 택하기도 하고 멀쩡히 생활 하다가도 한순간 그냥 저 세상을 택하기도 하지만 조금만 마음을 움직여도 다시 살아 나신다. 그야말로 말 한마디 마음 씀 하나로 사람이 살고 죽는다.


아버지 역시 이승을 떠날까 말까 그 중간지점에서 거의 저편으로 넘어 가셨기에 자식된 입장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것이 옳은일인가 며칠간 많은 생각을 했다. 결론은 원하는 대로 해드리는 쪽이 옳다는 결론을 내렸다. 자연사에서 삶과 죽음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저편으로 가시려고 몸의 모든 생체기능이 노화로 정지된 아버지가 자식이 며칠 돌봐드리니 점점 편안함을 느끼고 마음이 다시 삶쪽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흐트러진 정신이 돌아와 다시 식욕을 느끼고 의식이 몸에 실리기 시작하셨다. 식욕을 찾고 커피를 찾고 TV 보실 생각을 하시고.. 요양원도 설득을 하니 본인이 새로운 환경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하신듯 하다.


내장에 있던 쌓였던 모든 음식 노폐물들이 빠져나가고 며칠동안 잠을 주무시고 난후 어제 새벽 기적처럼 다시 정신이 돌아오셔서 나를 찾는다. 요양원 가시려던 마음이 또 바뀌어서 대화를 통해 현실을 받아 들이도록 설득을 한다.


누군가는 24시간 옆에서 갓난 아기 돌보듯 돌봐 드려야 하는데 언제까지 자식이 그럴수만은 없다. 과거엔 며느리들이 그것을 감당했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그것이 쉽지않다. 다행히 노인 복지가 좋아져서 국가에서 요양등급을 받으면 절반이상(7-80%)을 지원을 해주니 이제는 가정에 부담들이 많이 줄었다. 본인 노령연금 만으로도 나머지 충당이 되는 경우도 많다. 나라에서 지원금 타내려고 요양원에서 온갖 부작용들도 생겨나지만 제대로 된 요양원 선별만 잘하면 더할 나위없이 고마운 제도 이다. 아버지의 경우 5년전부터 이미 요양등급은 받아논 상태임에도 아버지의 고집이 요양원을 거부하셨다.


어제 고모들이랑 직접 요양원 둘러보고 전부 홀로 계시는것 보다 여러명이 생활하고 돌봐줄 사람이 상주하는 요양원이 낫다고 합의, 마음의 준비를 하실 기간을 드리고 원하는 날에 모시기로 날짜를 조율해 내일 오전에 모시기로 했다. 거동이 불가해 구급차 부르지 않게 되기만을 바란다.


*요양원을 여러곳 다녀보면 분위기가 각기 다른데 자식들이 관심을 갖지 않으면 분위기가 현대판 고려장 같은 요양원도 있다. 시설이 좋아도 분위기가 폐쇄적이고 외부와 차단 될수록 위험하다.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대부분 요양원들이 외부 방문이 차단돼 있어 더욱 꼼꼼하게 따져봐야 한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아버지는 20년전 뇌경색으로 쓰러지신 이후 아슬아슬 연례행사 처럼 위기가 찾아오고 넘어가고 고개 고개길을 힘들게 넘나들며 살아 가신다. 곧 돌아가실것 같은 상황을 몇차례 넘어 생활 하다보니 어느새 한국나이 90세 되셨다. 그저 아무일없이  세월이 무탈하게 흐르기만을 바라게 된다.


수십년 이어지는 질병과 노화 죽음을 옆에끼고 생활하시니 바라보는 자식된 입장에서  보내드리자니 슬프고 붙잡자니 거친 육체에 갇힌 영혼이 가련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그저 본인의 선택에 맡길수 밖에 없다.


식욕 배설등 생체기능이 정지된 상태로 의식이  '정말 편하다.. ' 노인들이 이렇게 느낄때가 이쪽에서 볼때는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그 유혹이 너무도 강렬해서 대부분이 다시 거친 육체로 넘어 오려고 하지 않는다.  순간 붙잡아야 하나 보내 드려야 하나 자식들은 갈등한다.


아버지는 당장은 다시 삶을 선택 하셨고 그것은 며칠간 옆에서 수족처럼 돌봐주는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실때는 조금의 미련도 없이 자발적으로 선택 하실때 까지 옆에서 지켜보면 된다. 누군가 24시간 돌봐주지 않으면 살아갈수 없는 인간 처음과 끝의 나약함.. 갓난 아이와 노인의 처지가 같다.


인간 에고는 아이의 탄생을 보면서 과거를 떠올리고 부모의 노쇠함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내다본다. 기저귀를 차고 자라나 대다수가 기저귀를 차고 생을 마감하게 된다. 아기때는 부모가 기저귀를 갈아주고 아이가 성장하면 부모의 기저귀를 갈아준다. 노쇠한 아버지를 통해 인간 삶의 순환을 보고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