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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Ah Feb 18. 2017

인간의 주체는 몸인가 의식인가?

육체의 상태에 따라 행복과 불행을 느끼는 인간 에고


돈 버는데 몰두하는 사업가들이 인간을 부자와 가난한자로 양분해보듯 내가 몸이 죽어가고 아프게되니 요즘 인간을 두종류로 양분해 보는 관점이 생겼다. 의식이 육체를 다스리는 인간과 육체에 의식이 종속된 인간,즉, 인간을 육체와 의식 둘로 나누어 봤을때 실제 주인은 육체와 의식 둘중 어느것인가? 이다.


외국 고어 공포영화중 '흉폭' 이란 영화가 있다. 강간당하고 죽음까지 몰린 여자가 구사일생 살아돌아와 직접 복수한다는 유명한 공포영화 시리즈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와 스토리는 별반 다를바 없다. 그런데 이영화가 내 무덤에...시리즈와 다른 독특한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 여자 몸에 다른 영혼이 들어와 '신끼' 서린 복수를 한다는 점이다. 몸을 차지한 다른 영혼은 주인공 여자의 몸이 어떻게 돼던 관심이 없다. 오로지 복수를 위해 자신이 차지한 몸을 회복불구의 망신창이로 내던진다. (그동안 암인걸 모르고 쓰러지기 전까지 무식하게 활동했던 나와 같다.)





본지가 꽤 돼서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거친 남자 살인범들과 대적하며 여자 역시 칼에 찔리고 온갖 부상을 당한다. 그럴때마다 여자의 몸을 차지한 영혼은 흙으로 몸을 채운다던지 하는 방식으로 당장 움직일수 있게끔만 만들어 결국은 복수를 끝마치게 된다. 복수를 마치고 남겨진 육체는 인간이라고 할수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다.


결국 복수를 마친후 여자를 구하러 온 남자애인은 원상복귀가 불가능하게 처참하게 망가진 애인의 몸을 보고는 편안한 죽음을 선사하게 된다.


신의 의식이 육체를 지배할때 이런 시체와 같은 육체도 멀쩡하게 움직이는 불가사의한 현상이 벌어지는데 인간의 의식은 이런 육체에 대한 완전한 지배력을 가질수가 없다. 도리어 반대로 육체의 상태에 따라 의식이 종속돼어 불행과 행복을 느끼게 된다.


대부분의 인간은 몸의 고통을 통제할수도 없고 몸이 병들어 가는것을 막을수도 없으며 나이를 먹으며 늙어가는 육체를 망연자실 바라볼수 밖에 없다. 통제가 전혀 불가능한 이런 육체의 주인이 과연 자신이라고 말할수 있을까.. 어쩌면 주인은 몸이고 에고라는 의식은 육체의 부산물 일지도 모른다. 꼬리를 재생시키는 도마뱀도 있고 상황에 따라 스스로 노화를 조절하는 곤충인 꿀벌도 있는데 육체를 통제하는면에 있어서는 인간은 그런 동물과 곤충만도 못하다.


몸의 주인은 누구인가..몸의 주인이 에고라면 어째서 고통과 병마 늙어가는 것에 아무런 통제를 하지 못하는가? 육체가 병들고 늙어가고 고통을 선사할때 비로서 에고는 한계를 느끼고 자신이 실제 육체의 주인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도리어 육체가 죽으면 자신도 사라질거라는 두려움을 갖게 되는데 육체가 만들어낸 부산물로 육체에 종속된 의식을 에고라고 말할수도 있다.


진정한 의식은 이런 육체에 종속된 에고와는 다른 인간의 '영혼' 이라고 표현할수도 있는데 그것이 진정한 자기자신이라고 할수있다. 의식은 에고와는 달리 육체를 지배할수도 있음을 증명하는 여러 사례들이 있다.


극히 드문 케이스로 라마링가 같이 '빛의몸' 이라 일컫는 의식으로 육체변형을 이룬 경우도 역사속에서는 종종 발견된다. 나의 경우는 아직 그 정도까지는 원하지 않는데 사회속에서 살아가는데 있어 남들과 확연히 다른 괴물, 돌연변이 취급 당하는것이 그다지 행복할것 같지 않아서 이다.


음식을 안먹고 사는 인간도 있을수 있지만 그런 생활이 과연 행복할까 라는 질문에 확답을 내리기도 쉽지않다.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는 즐거움이 인간사회에서는 매우 큰 즐거움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라마링가나 람타처럼 남들과 다른 빛의몸이 되기위해선 포기해야할것들이 꽤 많다.(어쩌면 인간 생활 모든것일수도 있다.) 인간 에고로선 결코 쉽지않은 선택이다. 역사적 기록으로도 극소수의 인간들만이 이런 극도의 선택을 했음을 알수있다.


앞으로 나의 화두는 에고의 편안함과 행복이 아니다. 진정한 나 자신 의식이 주체가 되는 삶을 사는것이 당장의 목표인데 현실에서 이미 철저하게 망가진 육체를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가장 난관이다. 말기암 상태로 에고에게 육체를 계속 맡겨두다가는 영화 '흉폭' 의 주인공처럼 얼마안가 끝장나게 되어있다.


나는 나의 에고를 원숭이라고 표현한다.몸이 조금만 아프면 죽겠다고 뒹굴대고 조금 편해지면 언제 그랬냐는듯 안면을 바꾸는 몰염치한 성질을 지녔다. 이런 몸의 변화 상태에 따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에고에게 나같은 경우는 더 이상 몸을 맡겨서는 안된다. 나는 실제로 죽음과 대면하고 있는 말기암 환자이기 때문이다. 통증과 죽음이 한발짝 물서섰다고 느끼자 바로 인스턴트 커피와 줄담배를 찾는 내안에 원숭이를 어떻게 해야하나... 이것이 현재 나의 화두이자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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