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며칠간 수많은 새들이 집앞 전깃줄에 일렬횡대로 모여든다. 처음 보는 광경이다. 크기는 참새만한데 색상이 흰검인것이 제비같다. 희안한것이 수백미터 길게 퍼져있는 전깃줄 인데 내 앞에 우리집 앞에만 죽 모여있고 좌우 시야 외곽 옆집 다른 전깃줄엔 한마리도 없다. 매일같이반상회 하는것 같다.
내 눈앞에서 어지러히 수십마리가 날아 다니다 줄에 앉고 반복이다. 세보니 족히 백여마리는 된다. 뭐라고 지저귀는지.. 서라운드 시스템이다. 너희들 왜 우리집 내앞에만 모여 있는거니? 물어도 이것들 전부 딴청이다.왜 특정 구역에만 다닥다닥 몰려 드는건지 인간이 알 도리가 없다.
동물들 세계에선 주변의 '살기'를 느끼고 알아 차리는것이 생사를 가른다. 본능적으로 자신들 해칠 사람인지 아닌지 동물들도 기를 느끼고 안다.고양이들은인간 주인을 선택한다고 하지 않는가. 일반적으로 생각해보면 동물들은 나를 잘 따르는 편이다. 갓 태어난 거북새끼도 다른 사람 제끼고 나를 향해 기어온다.
한가로운 시골 풍경속 이지만 매순간수많은 생명이 태어나고 죽음을 맞는다. 수많은 육신들과 신명들이 교차하고 갖가지 사연들을 만들어낸다. 천지가 죽이고 탄생 시키고 하는데 그 통안에서 나는 인간이라 커피를 마시고 밤엔 와인을 마신다. 그뿐이다.
어젯밤엔 산책겸 편의점 커피 담배사러 가다가 길가에 로드킬 당한 길양이 시체를 봤다. 이 시골 한적한 마을 주택가에서.. 저속으로 달리는 드문드문 차에 치였다는 말이다. 머리를 깔고 지나간 차 역시 자신이 뭔가 박살내고 지나쳤다는건 느꼈을텐데..
도심지 길양이들은 약아서 여간해선 차에 치이지 않는다. 시골의 길양이들이 차 무서운줄 모르고 있다가 로드킬을 당하는건데 시골길을운전하다 보면 하루에 수마리씩 길가에서 길양이들의 죽음을 어렵지 않게 보게된다. 그래도 좁은 주택가 도로에선 처음이다.
도로 옆으로 사체를 밀어서 다른차들이 더 깔아 뭉개지 않도록 해준다. 부디 좋은 세상에서 다시는 이런 고통 겪지 말기를.. 슬픈 합장으로 처참하게 죽은 고양이의 죽음을 위로한다.
시골밤에 울부짖는 길양이들의 통곡 소리는 그야말로 절규하는 어린 아이의 비명소리와 같다. 소들의 울음소리는 자식잃은 어미의 통곡같이 묵직하다. 인간세상에 산다는것이 그렇게 서러운지 온갖 가축들의 가슴을 에이는 울음소리들은 처절함 끝판이다. 동물들이 목놓아 단체로살아있음을 원망하고 통곡하는 소리들을 시골에선 밤에 쉽게 들을수 있다.
같은 공간에서 공존이 허락되지 않는것이 곤충들과 인간 같다. 일단 갸들이 인간을 단백질 덩어리로만 착각하고 문다. 민주주의 처럼 다수 위주로만 법칙을 규정하고 따진다면 시골집에선 인간이 주인이 아니다. 수백마리 곤충들이 살아가는 밀림에 고질라급인 인간 괴물 한마리가 살고 있는셈이다. 저녁때는 모기향을 피우고 끈적이와 채집기를 사용해 수많은 죽음을 거둬야 인간다운 생활이 유지된다.
그 수많은 의미없는 곤충들의 때죽음들에서 인간에 대한 원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원망한들 뭔 의미가 있으리오. 파리 목숨 한마리가 인간 생활에 큰 의미가 없듯 우주와 인간의 관계도 그러하다. 내가 사는 집에 곤충들이 때거지로 몰려들어 살겠다한들 주인은 인간이다.
인간사회에 퍼지는 바이러스가 인간이 파리 모기를 잡기위해 살충제를 뿌리는 모습과 다를바 없다. 지구가 살아가는데 인간이 해충노릇이나 한다면 당연히 청소하려 하는것이고 그것을 가지고 인간들이 남탓하고원망한들 무엇 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