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대 지지율로 대권을 거머쥐기 까지..
50대 이상은 박정희 정권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대선을 지켜보고 참여했던 세대다. 지금쯤은 좌우 양극단의 대립과 흐름 방향을 직접 겪어보며 이해할 나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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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치뤘던 대선중에서 가장 치졸하고 극단적으로 네거티브로만 달렸던 대선이 지난 대선이었고 가장 드라마틱 하면서 기적과 같은 역전극이 연이어 연출된 대선은 2003년 <노무현vs 이회창> 대결 이었다. 한 마디로 한국 정치사 최초로 고졸출신 노무현 당선은 천운이 만들어낸 한편의 드라마 였다. 후보로 선출되기 까지도 극적 드라마 였고 대선 후보가 됐을때도 반전에 반전이 이어졌다.
언론의 적대적 집중 포화속에서 가망없을것 같던 노무현이 위기때마다 회생, 대선 기간 내내 모든 언론이 ‘기적 또 기적’ 이란 문구를 계속 써 나갔다. 1% 대 지지율로 (1.6%) 모든 강자들을 꺽고 결국 대권까지 쥐었으니 인간이 만든 드라마는 결코 아닌것이다.
가망 없을것 같던 1% 대 지지율로 출발해 결국 당선까지 된 기적 말고도 노무현 당선은 국내 정치사상 최초로 비주류가 주류를 이긴 역사적 사건이다. 한국인 성향에서 보자면 상고 출신으로 노동자 계급의 대변인 노무현 당선은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된 미국 오바마때의 이변과 버금가는 역사적 사건이다.
* 오바마는 비록 껍데기는 최초의 흑인 대통령 이라지만 백인들 카르텔이 만들어낸 백인 정서에서 받아줄만한 세련된 백인스타일 귀족 흑인으로 백인들 엘리트 집단이 길러내고 내세운 아바타란 말이 돌았다. (어느 정도 사실이다.)
전 국민에게 노무현 이란 이름이 각인된 사건은 5공 광주 청문회 중계방송 이었다. 나는새도 무서워 스스로 떨어지던 기득권 권력과 전두환을 향해 명패를 던지고 분노로 호통치던 전사 노무현이 청문회 스타로 부각되며 민중의 지지를 받기 시작한다.
https://youtu.be/7SG07dVR4M8?si=9o7bWIhwiEDZc3r0
그는 지역감정을 타파하기 위해 전라도 출신이 아님 (경남 김해출신) 에도 전라도 지역색 강한 민주당원이 되어 스스로 적진출마를 자처했고 낙선을 거치면서도 결국엔 대권까지 쥐었다.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것엔 절대 굴복하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대선 당시 상대방 보수 진영 이회창 후보는 사회가 공인한 초엘리트 출신(대법원 대법관)으로 당시엔 권위가 있고 많은이들의 존경을 받던 인물이다. 고졸출신 노무현과는 여러모로 귀족적 품위(?)가 받쳐주고 본인이나 주변 비리라 할만한 흠결도 거의 없던 후보였던지라 상대적으로 초라한 배경을 지닌 노무현에겐 국민 정서상 만으로도 벅찬 상대였다.
*여태껏 보수 후보로 나섰던 인물들중 정치 초짜라는 능력에 대한 부분은 제외하고 이회창 만큼 그나마 흠결이 적은 후보는 없었던것 같다. 법관으로선 존경받을만 했지만 당선됐어도 정치력은 제로에 가까웠을거로 생각한다.
이회창 후보가 패배한 결정적 계기는 아들 군 면제 때문이다. 상류층 자제나 본인의 군대 면제 정도는 지금은 흠결정도도 아니(?) 지만 당시엔 대선에서 처음 그 카르텔이 밝혀지며 국민 감정의 가장 민감한 역린을 제대로 건드렸다. (보수측 의원 대부분 본인 군대면제와 자식면제 특권층들의 군대회피 규모가 이회창 후보 검증 과정에서 처음 공개적으로 밝혀지며 무조건 자식을 군대에 보내야 했던 일반 국민들의 대대적 공분을 일으켰다.) 결국 당시 국민 정서에서 아들하나 군대 안 보낸것이 역사를 갈랐고 모든 핸디캡에 대해 정면 돌파 스타일로 가망 없을것 같던 노무현에게 대권 당선이란 기적같은 시대적 행운을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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