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고의 나약한 한계를 인정하라
대부분의 인간이 자기자신 이라고 착각하는 의식이 바로 내가 말하는 의미의 '에고' 이다. 에고는 스스로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에서 결코 벗어나려 하지 않으므로 에고가 시도하는 대부분의 영성 의식의 공부등은 실패할수밖에 없다. 애당초 그 한계가 정해져 있기 때문인데 스스로는 그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계속 스스로를 괴롭히던지 불가능한 시도에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정확하게 에고의 실체를 바라보고 그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시간낭비 없이 실체를 이해하는 현명한 일이다. 인정해야 하는 한계란 다른것이 아니다.
"에고는 육체에 종속되어 지배를 받으며 감정에 지배를 당한다."
라는 단순한 매트릭스 세팅설정을 깨닫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지식으로 아무리 무장해도 이 세팅은 변하지 않는다. 이해도 되고 납득은 가지만 감정은 용납되지 않는 경우를 많이 경험해 봤을텐데 내면에 그것에 관련된 트라우마가 있을경우는 더더욱 상처를 자극하는 일들을 무심히 바라보기가 쉽지않게 된다.( 에고는 불가능하다.)
이것을 무리하게 벗어나 보겠다고 온갖 지식을 외우고 마음수련을 해도 결국은 언젠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에고는 심령계보다 낮은 차원의 의식으로 심령체를 지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도를 닦아 근엄한척 포장해도 아킬레스 건을 건드리면 에고들의 감춰진 상처들은 어김없이 분노로 표출되기 마련이다.
이것은 가족간, 부모 자식간, 형제간, 연인, 부부간에도 마찬가지로 에고는 모든 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알게모르게 상처들을 주고받게 되는데 감정에 휘말리지 않고 이런 상처들을 극복하는것이 에고들에겐 불가능에 가깝다. 종교나 마음공부 등을 통해 겉으론 치유된듯 보이지만 트라우마의 본질이 치유된것이 아니기 때문에 반창고를 아무리 덮어도 결국 언젠가 상처는 드러난다.
에고를 벗어났다 라는 말은 반대로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육체를 통제하고 지배하며 감정에 휘둘리는것이 아닌 자유자재로 자신과 타인의 감정을 조절할수 있다.' 라는 말이다. 에고를 벗고 심령계를 넘어서 이지체 의식에서 훈련을 통해 가능하다.
흔히 수련해서 무감정이 되는걸 '감정을 극복했다' 라고 착각하는것이 에고들의 일반적인 오해인데 수련을 통해 감정이 없어졌다는 것은 감정을 극복한것이 아니라 감정기능이 망가져 바보가 됐다는 말이다. 살인기계로 훈련받는 군인들이 대부분 이런 무감정의 훈련들을 받는다고 알려져있다.
감정에 지배당한다는 것은 단순히 음악을 감상하는것이고 에고를 벗어나 감정을 조절한다는 것은 직접 음악을 작곡하는것이라고 보면 된다.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음악을 만들려면 일반 감성과 더불어 그것을 다루는 보다 전문적인 테크닉이 필요하게 된다. 감성이 사라지면 작곡가로서의 생명은 끝나게 되므로 감정을 지배한다는 것은 일반인들 보다 더 감정은 풍부해지고 감성적이 되어도 휘둘리지는 않는다는것을 생각하면 되겠다.
육체에 종속돼어 육체의 상태에 따라 희비가 좌우되는것 또한 에고의 가장 큰 특징중 하나인데 에고가 육체에게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에고는 몸이 아파보기 전까지는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자기가 몸의 주인이라고 착각하며 살게되는데 중년이 넘어가게 되면서 서서히 여기저기 망가지고 아프기 시작해야 비로서 자신이 육체의 주인이 아닌 육체에 종속된 의식임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된다. 육체의 죽음과 더불어 자신도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불안과 두려움을 갖게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 두가지 특징이 '에고' 라는 의식이 가진 가장 허약한 약점인데 그래서 에고는 주변 에너지들에 휘둘리기도 쉽고 꺽여지기도 쉽다. 한마디로 이 두가지 약점에 조금만 충격을 가해도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이 에고란 껍데기 이다. '인간은 나약하다' 란 이야기는 사실은 ' 에고는 나약하다.' 라는 의미이다. 에고는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감정에 휘둘리면 무너지고 한계치의 육체의 고통앞에선 허무하게 무릎을 꿇는다.
깨지기 쉽고 상처받기 쉬운 타인의 에고를 존중하고 다치지 않도록 서로서로 케어하는 사회가 이상적인 인간 사회일텐데 인간들은 서로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온갖 감정들을 쏟아내고 온힘을 다해 전쟁을 치루듯 서로간 경쟁들을 한다. 게임에서 이기기위해 타인의 상처따윈 아랑곳하지 않는다.
"다칠라.. 살살 놀아.." 유치원에서 아이들이 서로 울게 뻔한데도 치고받는 장난들을 하는것처럼 에고들을 바라보는 심정도 이와 비슷하다. 사회속에서 무난하게 살아 나가려면 나약하고 깨지기 쉬운 에고들을 잘 보살펴야만 한다.
다른것 필요없이 감정과 육체를 보살피고 보호하는 것이 에고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일이다. 에고를 극복하겠다라는 무지로 에고가 스스로를 학대하거나 타인에게 에고를 벗으라 존엄성을 무시하게 되면 그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으므로 트라우마 만을 남기게 되는 무식한 행위이다. 에고끼리 치고받고 (누구 에고가 더 쎈가) 내면에 상처만을 남기는 그런짓은 절대 영성공부가 아님을 서로가 알아야만 한다..
에고가 에고를 벗어나겠다는 시도 자체가 말이 안되는 넌센스라는 것을 인정하는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에고의 실체를 인정하고 바라보고 에고가 가야하는 종착지로 에크하르트 톨레가 말하는 깨달음의 '틈새' 에 도달하면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에고 바라보기에 대한것은 에크하르트 톨레를 비롯, 이것저것 훌륭한 교과서들도 많고 찾아보면 여러 방법들이 있으므로 에고를 어떻게 활용할지는 각자가 선택할일이다. 틈새에 안착해서 그 다음에 그 자리에 안착할지 더 나아가 감정과 육체의 종속에서 벗어나 에고를 지배하는 단계로 더 나아갈진 그 다음에 결정해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