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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다떠는 옌 Feb 28. 2023

시절인연(時節因緣)

모든 인연(因緣)에는 때가 있다.


인연(因緣) : 시작과 끝


사람은 안 변해도 사랑은 변한다. 나는 사람을 들일 때 행동을 본다. 만날 때 보는 조건이 따로 있지 않고, 거창한 이상형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나간 인연들의 외관이나 성격을 모아보면 눈을 씻고 다시 봐도 나의 취향을 딱 정의하기 어렵다. 의문이 들었다. 난 그들을 왜 좋아했는가?


세상에 있는 부류 중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 VS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는 후자에 속한다. 그가 나에게 호감을 표시하면, 나도 그를 신경 쓰게 된다. 신경과 호감의 경계선에서 항상 나에게 질문을 던지고 헷갈리긴 하나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땐 구분한다. 먼저 시그널을 보내는 용감한 그들은 좋아하는 여성이 생기면 마음을 얻기 위해 무엇이든 하려는 것 같다. 언제 그렇게 가까웠고 중요한 사람이었다고, 하루의 빈틈을 잘 파악하고 쏙쏙 들어오던지. 만나기라도 하면 배려도 그만한 배려가 없다. 소중한 시간과 돈을 할애하며 헌신해 주고 앞뒤 재지 않고 마음을 표현하며 확신을 주는 그가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해주나. 의문, 의심, 반감, 불안, 기쁨, 애정, 뿌듯, 행복 등의 감정들이 기묘하게 뒤 섞이는 순간이다. 그래서일까, 그 시간은 가장 소중하고 조심스럽다. 그가 조금씩 일상에 스며드는 시점에서 조금이라도 오만하게 굴거나 우쭐해서 그들의 자존심을 건들고 싶지 않았고, 그들의 마음을 존중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처음 다짐했던 마음을 오래 유지하긴 어려웠나보다. 쉽게 풀리는 문제집은 시시해서 금방 덮듯이 틈 속에서 힌트를 얻은 사람들은 유통기한이 짧더라.


지금도 어리지만 아주 어렸던 20대 극 초반에 사랑은 변한다는 생각이 가득 차서 언제 본색을 드러낼지 모르는 그들을 경계했다. 그래서 연인으로 발전되면 그에게 신경을 끄고 수동적으로 연애가 이어지길 바랐다. 더 마음이 깊어지고 커지면 내가 힘들까 봐, 선을 먼저 그었고 관계를 먼저 끝내기에 급급했다. 그리고 그땐 몰랐다. 아무리 쉽게 이어졌어도 한 번 맺은 인연은 흔적이 남는다는걸. 그리고 이별의 무게를 몰랐다. 관계의 끝이 이렇게나 공허하고 허무한 것인 줄 정말 몰랐다.


그렇게 나는 누군가의 썸머(영화 <500일의 썸머>의 남자 주인공 시점으로 본 그의 여자친구 썸머는 나쁜 년으로 표현된다)로 기록됐다. 우리가 수많은 사람들 속에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면, 친구의 연 마저 안 맺었더라면, 서로를 모른 채 각자의 길을 갔더라면. "우리 인연이 거기까지였더라면, 어땠을까."


그 인연에 이렇게 연연하고 있지는 않았겠지.






시절인연(時節因緣)


연애는 대자연과 같은 현상 같다. 자연의 순리로 예상치도 못한 강도의 지진이 오듯 나도 몰랐던 이상한 내면과 감정에 휩싸여 고통받기도 하고, 지진에 의해서 기존에 자리 잡고 띠고 있던 형태들이 변하기도 하면서 과도기에 이르기도 한다. 이러한 상태를 받아들일 수 있는 때가 있고, 방황하는 때가 있는데. 풋사랑 같은 경우 나도 몰랐던 나의 모습에 당황하느라 상대를 배려하지 못해서 먼 훗날 더 기억에 남는 것 같다. 그때의 나를 보듬어준 그 사람과 어렸던 나의 모습이 계속 밟히니까. 가끔 생각해 본다. 지금 너를 만났더라면 우리는 '그때'보다 더 예뻤을까.


시절인연(時節因緣), 불교의 인과응보설에 의하면 아무리 거부해도 때와 인연이 맞으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또한 인연의 시작과 끝도 자연의 섭리대로 시기가 정해져 있다는 뜻도 내포한다. 시절인연이 맞으면 아무리 거부해도 인연을 만들게 되고, 시절인연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인연을 맺으려 애써도 인연을 맺을 수 없게 된다. 너와 내가 그때 만난 것은 우리의 시절인연이 그 시기에 맞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거부했어도 우린 만났을 거다. 지금의 우리를 보면 거부하기도 싫었던 걸 거야. 그때 만약 거부할 수 있었더라면,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뤄서 오래 옆에 둘 수 있는 사람으로 남았더라면 우리는 어땠을까. 왜 하필 우리의 시절인연은 내가 가장 바닥이던 때였던 걸까.

아니다, 어쩌면 그때의 너였기에 보잘것없던 나의 내면까지도 보듬어줬던 거겠지. 그때의 너여서 가능했던 거겠지.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으니까.


한때 하나뿐인 단짝이던 너와 내가 지금은 스쳐 지나가는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다.

슬프다. 인연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사실이.

인연의 시작과 끝의 섭리를 외면하고 싶다. 그래왔다. 오랫동안 그래왔다.


그러니 이젠 받아들이자.

"우리 인연은 딱 여기까지였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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