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에게 배운 '첫 사랑'의 감정으로 사랑을 할 수 있게 됐다.
'첫사랑'
고등학생 때 연애는 소꿉놀이로 치부하는 나이대에 발을 들이게 되어도 그토록 다를 게 없었다. 20살, 성인이면 다른 무언가 있을 것만 같았는데, 그냥 술만 주구장창 마시더라. 특히 연애. 어른의 연애를 기대했는데 소개팅이라는 새로운 경험에서 고등학생 때보다 사람을 더 가볍게 만날 수 있다는 사실만 알게 된 채 20살의 연애는 학생 때와 똑같이 적정 거리를 두며 감정을 나누고 카톡을 주고받고 가끔 장시간 통화도하고, 데이트라 해봤자 서울 몇 시간 나갔다 오고, 감정싸움 몇 번 하면 이 사람과 나는 안 맞는구나 생각하며 쉽게 이별을 고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이 없어도 내 일상이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쉽게 도려낼 수 있는 만큼만 차지했던 연애였으니까. 당시 누군가 나에게 첫사랑이 있느냐 물었을 땐 시기상 처음 만난 중학교 때의 연애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내가 남자랑 손잡고 길거리를 다닐 수 있구나, 가족 말고도 입술로 사랑을 표현할 수 있구나를 알려준 50일간의 귀여웠던 그 연애. 그땐 '사랑'이라는 단어보다 '처음'이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췄으니까.
수차례 연애와 잠시 스쳐 지나간 사람들을 보내고 나니, 그 '첫사랑'의 의미를 진심으로 알겠더라. 시간이 지나면 미화되기 일쑤지만 굳이 나쁘게만 생각해서도 좋을 건 없더라고. 함께 붙어 있는 날이 하루하루 더해지면서 연인이 나에게 그리고 내가 그의 일상에 스며들고 있는 느낌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알게 됐다.
불면증을 앓았던 터라 한없이 깊었고 어두웠던 나의 새벽에 찾아와 준 사람이 있었다. 나 하나 웃기겠다고 온 힘을 다해 안면 근육을 사용하던 사람이 있었다. 맛있는 음식이 앞에 있으면 나를 먼저 맛보게 하고 내가 맛있다고 답했을 때 그제야 자신의 숟가락을 들던 사람이 있었다. 장난기 가득해도 분위기 잡히면 낯간지러운 말을 스스럼없이 하던 사람이 있었다. 이런 사람이 내 곁에 '있었다.' 나는 너를 이렇게 기억하고 싶다.
처음으로 사랑을 알게 해 준 사람.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
이젠 못 보는 사람, 사랑.
너와 만나기 전 내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모든 흔적에서 너의 이름만은 지우려 노력했는데, 결국 이렇게라도 남는구나. 흔적도 없기엔 너무 열심히였다, 우리. 그래서 앞으로 '첫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러 보려고. 이렇게라도 가장 아름다웠던 20대 초 나의 추억을 잃고 싶지 않아서.
첫 '사랑'
가끔 그립다. 그때의 내가. 그리고 첫 '사랑'에 대한 감정을 느꼈던 그때가. 미성숙하고 어리숙한 사랑에 대한 내 모든 감정과 표현을 쏟아낸 그때의 나와 다시 마주하고 싶다. 연애 감정과 이별에 무던한 내가 아니라, 네가 준 사랑만큼 웃고, 네가 준 상처만큼 울고, 앞뒤 재지 않고 과감히 행동했던 그때의 나. 가장 예쁜 나이에 너를 만나 가장 예쁘게 웃을 수 있었다. 가장 힘든 시기에 은은하게 기댈 수 있었다. 사람을 이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나 싶은 동시에 사람을 이렇게까지 미워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비록 우리가 끝까지 애틋하고 처음과 같았던 건 아니지만, 그때 우리에겐 그게 최선이었을 거라고 믿는다. 그래서 네가 그립진 않다. 여러 차례 다시 시도했지만 그때 우리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그런데, 내가 나를 그리워하듯이 너도 그때의 너를 그리워했으면 좋겠다. 나를 사랑하는 네가 정말 예뻤으니까. 여자만 사랑할 때 예쁠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
첫 '사랑'의 감정은 두 번 못 느끼나 보다. 같은 사람한테도 시간이 지나면 처음과 똑같이 느끼기 쉽지 않다는 걸 알았다. 처음 느꼈던 '사랑'이 특별하면서도 무서워서 계속 붙잡으려 했다. 이 감정이 사라지면 안 될 것만 같아서 그 감정 다시 느끼려고 애썼는데, 그때부터 잘못된 것 같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집착하고 잔잔하게 스며들어 있던 익숙함은 무시한 채 계속해서 처음으로 돌아가려 했던 것 같다. 너와 내가 변해서가 아니라 '처음'은 항상 지나가는 시기이기에 '다시', '똑같이' 재현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감정에 왜 그렇게 집착했을까. 너는 익숙함 속에서 느껴지는 또 다른 사랑을 나에게 알려주려 노력했다. 나는 그런 네가 변한 것만 같았다. 네가 변한 게 아니라 널 보는 나의 눈이 변했던 거였는데 말이야.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다시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때 감정은 두 번 다시 느끼지 못하는 거였다. 그렇게 너랑 나눴던 감정은 첫 '사랑'으로 기록됐다.
네가 알려준 첫 '사랑' 덕분에 내가 알고 살아왔던 사랑이 다가 아님을 알았다. 사랑을 어떻게 주고, 받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됐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어떤 상태인지 알게 됐다. 덕분에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랑하는 법을 알려줘서 고마워.
영화 <노트북>에서 앨리와 노아가 만나자마자 달려가서 들춰안고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웃던 그 장면을 가장 좋아한다. 얼마나 사랑하고 애틋하면 저렇게 될까 늘 의아했다. 그게 되더라. 마음을 의심하기도 전에 달려가 안기고 있더라. 그런 나를 너는 힘껏 안아줬다. 그때 지나가던 할머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좋을 때다."
맞다. 좋을 때였다. 너에게도 좋았을 때로 기억에 남았으면 좋겠다. 나를 로맨스 영화 속 주인공으로 만들어줘서 고마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