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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다떠는 옌 Jun 09. 2024

아버지의 디지털카메라

여름의 코스모스 사이에 홀로 선 '루드베키아'가 좋다.


아버지의 책상 왼쪽 서랍 한편에는 아주 오래된 삼O 디지털카메라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동안은 볼 때마다 별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갑자기 그게 갖고 싶었다. 

나는 곧장 아버지한테 말씀드렸다. 

“저 카메라 캐나다에 가져갈래요.” 아버지께서는 흔쾌히 안 쓴 지 오래됐지만 작동은 될 거라며 충전기와 함께 내게 물려(?) 주셨다.


2000년대 초에 사용하던 24핀 표준 충전기를 보니 아주 오래전 모델임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께서 이 디지털카메라로 나를 찍어주셨던 기억이 또 새록새록 올라오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전부터 나는 사진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요즘 잘 나가는 소O, 후O, 캐O 등의 100만 원 정도의 카메라를 구매할 자신과 피사체에 맞게 노출이며 화각이며 조절하면서 촬영할 수 있는 전문성은 없었기에 이 디지털카메라가 나의 추억을 기록하기에 알맞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물려받은 아버지의 디지털카메라로 나는 한국에서의 남은 기간 동안에 이것저것 찍어 보기로 했다. 캐나다에서 더 많은 추억들을 잘 기록하기 위한 일종의 연습으로.


해 지는 저녁의 보랏빛 하늘. 평소 내가 자주 지나가는 거리. 내가 좋아하는 길 고양이. 이 여름날의 푸르른 색. 노란색으로 덮인 여름의 꽃들. 나를 배웅해 주는 사람들. 그들의 웃음과 분위기 등을 담기 위해 내가 일생 동안 거느렸던 거리를 다시 걸어보기로 했다. 작고 소중한 아름다움을 찾아 다녀보기로. 


아버지의 디지털카메라와 함께.




무심코 떠난 나의 첫 번째 거리는 20대 청춘의 시작을 함께 한 대학교로 정했다. 


종강까지 남은 기간 동안 근로를 하러 가든, 수업을 들으러 가든, 친구를 만나러 가든, 운동장 산책을 나가던 어느 때든지 디지털카메라를 손에 꼭 쥐고 학교를 돌아다녔다. 


본관 옆 작은 잔디밭 언덕에 깔린 민들레를 담으러. 도서관 옆 띄엄띄엄 자란 미니 튤립을 담으러. 작은 호수 위에 뽈-뽈- 돌아다니는 오리를 담으러. 내 대학생활의 꽃이 되어 준 친구들을 담으러. 

다시금 그곳을 걸어봤다.



두 번째 거리는 ‘해방촌’이었다. 


이유는 크게 없었다. 맛있는 베이글 집이 있고, 서울의 랜드마크인 남산타워를 찍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 


만약에 내가 캐나다 가서 외국인 친구를 사귀게 된다면 보여주고 싶어서 였을까. 무엇보다,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해서 해방촌 언덕의 샛길에 있는 골목골목을 아무 생각 없이 걸어보고 싶었다. 그곳의 소소한 일상과 한국의 평범한 골목 분위기를 카메라에 담아보고 싶었다. 


그 골목에는 마치 내가 바라던 아름다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는 나의 동네를 걸어 다녔다. 본가에 돌아오는 주말마다 집 앞에 있는 공원을 산책할 때. 친구를 만나러 상업지구로 나가게 될 때. 유년시절을 보냈던 그곳을 카메라로 둘러보았다. 내가 자라 온 그 동네도 오늘날의 나만큼 달라졌지만. 더 변하기 전에 얼른 담아 놓고 싶었다.


한 2주 간은 사진을 찍으며 돌아다녔다. 저 세 거리 외에도 일상 속에서 아버지의 디지털카메라를 항상 주머니에 담고 다녔다. 신경과 치료받으러 서울에 가는 길에도 하늘이나 철도를 찍고, 한의원 앞에 파는 꽃집의 꽃도 조심스레 찍고 그랬다. 


일과 틈틈이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보내니, 신경을 쏟을 다른 것이 생기니 나의 하루하루가 조금 가벼워지는 듯했다.


아버지의 디지털카메라는 나에게 하나의 쉼을 만들어 줬다. 

아무 생각 없이 셔터를 누르던 그 순간에 내 걱정거리도 함께 잊혔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찍은 사진들을 예쁘게 모아 보니 알았다. 

나는 꽃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사진을 넘길 때마다 꽃들이 어찌나 나오던지. 샛 노란 것이 밭처럼 펼쳐져 있던 여름의 코스모스 ‘금계국(Golden-Wave)’. 여름의 코스모스 사이에 핀 해바라기 같은 인디언 국화 ‘루드베키아(cone flower)’. 그리고, 그 옆에 자그맣게 핀 작은 계란 꽃 ‘개망초(daisy fleabane)’. 


이 세 친구들이 내 앨범을 가득 채웠다.


나는 이 중에서도 여름의 코스모스 사이에 홀로 서있는 인디언 국화 ‘루드베키아’가 좋더라. 해바라기보다 더 태양을 닮은 것이 모여있지도 않고 홀로 서 있더라도 강렬한 인상을 준다. 


이후에도 나는 ‘루드베키아’의 꽃말을 확인하곤 더 좋아하게 됐다. 뻔하면서도 그때 당시엔 그 꽃말이 어찌나 인상적이던지. 원래 사람이 아플 때 더 감성적이게 되나 보다.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세상 모든 명언들, 좋은 구절들이 모두 나를 이야기하는 것 같을 때. 모두 나를 위로해 주는 것 같이 느껴질 때. 나는 그런 시기에 ‘루드베키아’를 만나 이 꽃말을 본 것이다.


“영원한 행복.”




고마웠다. 

그 더운 여름날 홀로 강려하게 피어있던 ‘루드베키아’에게. 


햇빛을 받으면 더 금빛이 돋아 여름을 빛날 수 있게 해 준 ‘금계국’에게. 삼삼오오 옹졸하게 모여 친구랑 화해하러 가는 어린아이의 순수한 마음과 같은 작은 계란 꽃 ‘개망초’에게.


그리고 이 모든 걸 담을 수 있게 해 준 

‘아버지의 디지털카메라’에게도.


어쩌면 그때의 난 모든 것이 내 행복을 응원해 줬다고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 인디언 국화 '루드베키아(cone flower)' : "영원한 행복"


#. 여름의 코스모스 '금계국(Golden-Wave)' : "상쾌한 기분"


#. 작은 계란 꽃 '개망초(daisy fleabane)' : "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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