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가 우선
내 수업은 <게임>과 <미술>두 가지이다. 룰은 단 하나, 영어로 말한다는 것이다. 학생의 연령대와 특성에 따라 조금씩 바뀌고 나이가 있는 학생들에게 아주 기본적인 시제와 조동사 문법을 가르치긴 하지만 나의 수업은 내가 만든 영어 말하기 게임과 영어로 하는 미술 수업이다. 미술 수업을 할 때는 침묵이 길어지지 않도록 대화를 유도하는 질문이면 충분하다. 아이들은 미술 수업을 하면서 요즘 읽고 있는 책에 대해서 설명하다가 갈색 물감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스페어 종이비행기는 몇 개까지 접어놓아도 되는지 물어본다. 영어로 말하는 것이 중요한 수업이기 때문에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튀거나 만들기를 끝내지 않아도 괜찮다. 그냥 한 시간 동안 영어만 듣고 말하며 재미있는 활동을 하는 것을 목표로 수업을 해온 지 13년이다. 보통 학원에서 배우는 영어가 지루하고 힘들어서 영어가 싫어진 아이들의 부모님이 나의 연락처를 어찌어찌 받으시고 "다른 것보다 아이들이 영어를 재밌어 할 수 있게만 도와주세요."라고 말씀하신다.
13년 동안 수업하면서 만들어온 수많은 영어 말하기 게임들은 소박한 나의 재산이 되었다. 이 일을 그만하려고 하니 이것들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게임들의 운명은 아직 고민 중이지만 많은 아이들이 영어를 재밌게 배웠으면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 게임, 놀이들을 어떻게든 공개해야 할 것 같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내가 만든 영어 게임들이 그렇게 특별한 것들은 아니다. 이미 유명한 게임들을 변형한 경우가 많고, 한국에서 유명한 게임을 영어로 진행하는 것뿐인 경우도 있다. 다만 영어 수업 때 사용하는 게임을 디자인하거나 선택할 때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를 간단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무조건 재미 > 영어
영어 게임을 만들 때 더 많은, 더 새로운 표현들을 말하게 하고 싶은 욕심에 룰이 너무 복잡해지거나, 억지로 너무 많은 목표를 넣은 게임들은 실패할 확률이 매우 높다.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무조건 아이들이 영어를 말하고 듣는 경험에서 재미를 느끼는 것이다. 오늘 할 게임으로 배울 것이 Yes, No를 말하는 것뿐이어도 괜찮고, 심지어 영어 표현을 익힌다는 목표가 전혀 없어도 괜찮다. 영어 게임을 만들 때는 아이들이 하기 어려운 부분이나 부담스러워하는 부분은 과감히 제거하고 재미에 초점은 맞추는 것이 항상 더 나은 선택이다.
예를 들어 보물 찾기는 13년 동안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게임이다. 남자아이 여자아이 구분 없이 모든 아이들이 좋아하는 놀이이고 좋아하는 연령대도 넓다. 나도 이 게임을 하면서 방을 뛰어다니면 재미있다. 절대 한 번 또는 하루에 끝나는 게임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번 며칠 동안 반복할 각오로 시작한다. 보물찾기 놀이로 영어 교육을 같이 하고자 하는 목표를 정했다면 어떻게 게임을 수정하고 진행할 수 있을까? 다음 부분을 읽기 전에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해봐도 좋을 것 같다.
일단 왠지 찾아야 하는 보물이 영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보물찾기 게임을 하는데 보물 대신 영어 문장이나 단어를 적은 종이나 카드를 숨기는 걸로 진행한다고 해보자. 종이에 오늘 배워야 하는 새로운 단어 또는 패턴이 적혀있고 아이들은 그것을 찾는 것이 목표다. 욕심 없이 하자고 했으니 다섯 개, 아니 세 개 정도만 적는다. 예쁜 종이에 예쁜 펜으로 적어서 비행기, 개구리, 하트 모양으로 접거나 예쁜 카드를 만들어서 숨기면 찾을 때도 더 기뻐하지 않을까? 이렇게 디자인 한 게임이 효과가 없거나 재미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영어가 적힌 종이로 시작하면 찾은 뒤에 괜히 그걸 읽고 외워야 할 것 같고, 신나게 놀았는데 마지막은 앉아서 그 영어를 읽고 있는 것으로 마무리하게 될 수도 있다. 보물찾기 같이 몸을 움직이는 게임의 마무리는 무조건 아이들이 노는데 에너지를 다 쏟아서 지쳐 소파에 널브러져 있는 것이 가장 좋다. 놀이에 신난 아이들을 마지막에 앉혀놓고 영어를 읽어야 하는 게임이라면 아주 좋은 게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보물찾기 놀이를 이렇게 진행한다.
먼저 게임을 진행할 방의 지도를 그리게 한다. 지도를 그릴 종이는 커피나 차 등으로 염색해서 아이들이 대충 펜으로 그려 완성해도 뭔가 그럴듯한 옛날 보물처럼 보이도록 한다. 지도로 시작하는 이유는 세 가지이다. 먼저, 아이들이 지도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어린아이들은 보통 지도를 그리는 방법을 전혀 모르는데 그걸 가르칠 수 있는 기회도 된다. 하지만 꼭 부감 구도를 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시점을 객관화해서 내가 보는 시점과 내가 빠진 공간이 보는 시점의 입장을 구별할 수 있게 된다. 생각보다 많은 아이들이 TV 왼쪽 옆에 있는 문과 TV 오른쪽 옆에 있는 시계를 그리는 것을 어려워한다. TV 앞에 서보고 방향을 확인해야 한다. 그런 모습들이 귀엽다. 두 번째 이유는 이때 자연스럽게 영어 단어를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방은 한 개로 제한하는 것이 좋다. 거실이라면 table, clock, TV, couch, bookshelf, desk, door, window, light switch 등등 많은 단어를 배울 수 있다. 단어를 외우게 하지 말고 그냥 자기가 그리고 있는 지도에 직접 적도록 한다. "What is this?"라고 물어보고 "탁자"라고 하면 "That's a table. T-A-B-L-E, table." 이렇게 스펠링을 알려주는 것으로 끝내면 된다. 따라 읽게 할 필요도 없다. 적어놓으면 보물을 찾을 때마다 보고 읽고 들어야 해서 놀이가 끝나면 어느 정도 익히게 된다. 지도를 그리는 마지막 이유는 아이들이 보물 놓은 자리를 자주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찾는 것보다 숨기는 것을 더 좋아할 때가 있는데, 아이들이 보물 숨겨놓은 곳을 잊어버리면 당황해서 게임의 흐름이 끊길 수 있다. 문구점에서 작은 스티커를 사서 보물을 숨기고 스티커를 보물 위치에 붙이게 한다. 숨겨둔 보물이 3개라면 스티커는 5~6개 정도 붙여서 헷갈리게 하는 것이 좋겠다. 아이들은 거짓말하는 것도 아주 좋아해서 자기가 지도에서 거짓으로 붙여놓은 스티커 부분을 열심히 찾고 있으면 엄청 신나 한다.(너무 귀여워!) 이렇게 만든 지도는 아이들이 오래 간직하기도 한다. 다음에 같은 놀이를 할 때 같은 지도를 사용한다. 지도가 해질수록 뭔가 더 그럴듯해 보인다.
보물찾기 게임의 본질은 보물을 찾는 것일 뿐이다. 보물이 영어 카드일 필요도 없고 그걸 찾아서 뭘 배워야 할 필요도 없다. 보물찾기 게임이 끝나고 나면 주머니에 넣어 간직하고 싶을 만큼 소중하게 대할 수 있는 것으로 준비하자. 반짝이는 플라스틱 보석도 좋고, 무지개색 나무 막대기도 좋고, 미니어처 포켓몬스터 인형도 좋다. 색깔마다 점수를 다르게 하는 것도 게임을 더 흥미롭게 만들 수 있다. 게임이 복잡해지려면 이런 부분이 복잡해지는 것이 영어 단어나 문장을 많이 써서 복잡해지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 이런 게임은 아이들이 다시 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지도를 그릴 때 영어 단어를 적고, 보물을 숨기고 찾으며 "Close your eyes.", "No peeking!", "You have one more minute.", "Where's my map!", "What's this again? Bookshelf?", "Aah! I can't find it!" 이 정도 문장을 말하며 게임을 진행하는 걸로 충분히 영어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한다. 반복하면 아이들이 알아듣고, 직접 말하기도 한다. 앉아서 종이에 적힌 패턴이나 단어를 읽는 것으로 마무리하지 않아도 효과적인 영어 수업이 된다. 그리고, 게임에 충분히 익숙해지고 영어 보물찾기 자체를 즐기게 되면 그때 가서 영어 카드나 패턴을 시도해보는 것이 좋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놀이가 끝난 후 앉혀서 읽게 하지 말고 차라리 카드를 보관할 수 있는 예쁜 앨범이나 다이어리를 사주자. 거기에 아이들이 찾은 카드를 직접 모으기 시작하면 즐거웠던 보물찾기 놀이를 기억하며 혼자 방에서 들여다볼 수도 있다. 이렇게 은근하고 엉큼한(?) 설득이 영어를 즐거운 것으로 만드는데 더 효과적이다.
숨기고 찾고 숨기고 찾고 숨기고 찾고 숨기고 찾고 숨기고 찾고
숨기고 찾고 숨기고 찾는 것을 14번쯤 반복하고 나면 아이들이 지쳐서 드러눕는다. 그러면 드디어 오늘의 놀이는 끝났다. 차분히 앉아서 지도 그리고 영어 단어를 쓰는데 3~40분을 썼다고 해도 나머지 시간 동안 열심히 방 전체를 돌아다니며 움직이면 땀나고 지친다. "오늘 영어 놀이 끝~"하고 부엌 가서 아이스크림 꺼내 먹으면 된다.
<얼른 생각나서 적는 추가 팁>
내 지도는 먼저 그려놓고 아이의 지도를 도와주는 것이 좋다. 아이의 지도가 읽기 어려운 경우가 꽤 있기 때문에 내가 그린 비교적 정확한 지도가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들이 직접 그린 지도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다면 좋다.
보물을 숨길 때 가구나 물건이 움직이며 들리는 소리가 있어서 들킬 수 있다. 아이들은 이 부분을 조절하기가 쉽지 않으니 숨길 때는 음악을 틀어놔도 괜찮고, 아니면 다른 물건 소리를 일부러 내면서 속이는 법을 알려주면 좋다.
타이머를 설정해놓고 하는 것이 좋다. 나는 아이들 나이에 따라 숨기는 데 1~2분, 찾는데 4~5분 정도로 한다. 아이들이 오랫동안 못 찾으면 지치고, 아이들이 숨겼을 때 내가 오랫동안 못 찾는 것도 답답해하기 때문에 깔끔하게 타이머를 설정하는 것이 좋다.
아이들이 물건을 찾는 도중에 한국어를 사용한다고 뭐라고 하지 말자. 시간은 흐르고 있고 보물은 안 보여서 급해 죽겠는데, 너무 이기고 싶은데 영어 안 쓴다고 뭐라고 하면 좀 짜증 난다.
사실 영어를 재미있게 배우기 위한 놀기, 게임을 디자인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로 적은 이 팁이 다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해서, 이 하나만 명심하고 새로운 영어 게임이나 놀이를 수없이 만들어도 괜찮을 만큼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것이 필요가 없다.
하지만 브런치 북을 발행하려면 글 개수를 채워야 해서 팁을 2개 더 써야겠다. ^^ 어쨌든, 영어 놀이/게임을 할 때는 영어를 가르치려는 욕심보다 놀이 자체의 재미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만 기억하자. 그리고 엄마표/아빠표 영어에 관심이 많은 학부모라면, 매일 읽어야 하는 책을 오늘 하루 내려놓더라도 아이가 깔끔하게 가공되고 정돈되지 않은 아이만의 영어를 마음껏 말하고 소리 지르며 즐길 수 있는 놀이를 디자인해보자. 아이들이 영어를 듣고 말하며 즐거워하면 그 보람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