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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타는 여여사 Apr 18. 2019

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타인에 대한 관심 또는 오지랖

주인공 ‘나’는 초등학교 1학년으로 나무 타기를 좋아하고 언덕 아래로 달려서 날아오르기를 꿈꾸는 소년이다. 아버지를 따라 경마장을 다녀온 날도, 짝사랑하던 여자 친구와 약속이 깨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도, 피아노 학원 원장 선생님의 히스테릭한 잔소리를 듣고 나무에서 떨어지려고 했던 날도, 내 눈에는 저 멀리 점과 같은 모습으로 좀머 씨가 나타난다. 밀폐 공포증 환자인 좀머(막시밀리안 에른스트 애기디우스 좀머) 씨는 3월 초부터 10월 말까지를 여름(좀머)으로 생각하고, 호두나무 지팡이와 배낭을 메고, 여름과 겨울만 구분되는 옷을 대충 입고 하루에 12시간, 14시간, 16시간 또는 그 이상을 걷는다. 부인이 죽고 어느 날, 외골수였던 좀머 씨는 늘 걸어 다니던 그 호수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고, 나는 분신이었던 지팡이까지 던지며 호수 안으로 들어가는 좀머 씨의 모습을 지켜본다. 고등학교 5학년이 된 나는 더 이상 나무에 오르지 않고, 갈릴레이 갈릴레오의 낙하 법칙을 따라 하늘을 나는 상상을 하지 않으며 세월을 따라 성장해간다. 나의 유년 시절도 그렇게 지나간다.  




‘그러다가 죽겠어요!’,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폭우가 쏟아지고 우박까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좀머 씨는 차에 타라는 주인공 아버지의 ‘틀에 박힌 빈말’을 거칠게 거부하면서 쏘아붙인다.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그냥 놔 달라는 좀머 씨의 표정은 짜증이 섞인 말이 아니라 공포에 질린 표정이었다. 걷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 좀머 씨는 그렇게 매일 걷는다. 주인공 아버지뿐만 아니라 마을 주민이 내민 손길이 좀머 씨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전쟁의 상처를 입었는지, 혹은 치유되지 못한 트라우마를 겪었는지 소설에는 자세히 서술되어 있지 않지만, 짐작하기에 혼자 세상에서 고립되기를 자처한 사람 같다. 그러나 왠지 좀머 씨는 혼자만의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그 나름으로 살기 위해서 그렇게 걷고 있는 게 아닐까. 주변에서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더라도. 



만족과 쾌락을 위한 우리 각자의 선택


주인공은 나무 타기를 좋아한다. 아버지는 경마를 좋아한다. 어머니는 은근슬쩍 주변 사람들의 얘기를 전달하는 것을 좋아한다. 피아노 원장 선생님은 본인이 만든 테두리 안에서만 결정하고 옳다고 생각한다. 좀머 씨는 쉬지 않고 걷는다. 자신의 만족과 쾌락을 좇아 무엇인가를 한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각자가 만든 가치관 또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살아간다. 타인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거리는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다. 좀머 씨처럼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지, 아니면 너와 나처럼 두루두루 사회성을 유지할 수 있는 적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지 말이다. 나 자신의 만족과 쾌락을 위해 선택한 일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도덕적 범주 내에서라면... 이런 어려운 조건 안에서 선택한 일이라면 주변의 시선 따위는 허락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는지. 



그런 어른의 이야기


좀머 씨의 마지막 삶은 충격적이다. 일생 동안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고자 했고 주변의 관심이 부담스러운, 주변의 무관심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그가 호수 속으로 걸어가야만 했던 상실감은 무엇이었을까. 삶의 목표를 잃어버린 이유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가 언제 죽었는지조차 주변 사람들은 몰랐고, 죽음에 대한 무수한 말들만 허공으로 흩어졌다.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라는’ 고집스러우면서 절망적인 좀머 씨의 몸짓을 주인공만 이해하고 있었던 걸까. 좀머 씨의 삶은 7살 꼬마가 어른으로 성장해 나가는데 어떤 기억으로 남았을지 궁금하다. 


지나고 보니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어른이 있었어요. 

그런 어른의 이야기를 적고 싶었어요. 

어쩌면 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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