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바뀌고도 세상은 여전하다. 기온은 올라 불현듯 봄날이 되어버렸다. 동생과 자주 걷고 있다. 아침마다 아랫동네까지 한 시간 가량 다녀오는 산책은 늘 하던 것이고, 이젠 오후에도 좀 먼 곳까지 걸어갔다 온다. 오후 산책은 주로 지대가 높은 고갯길 도로를 향한다. 두어 시간 걷는 동안 차량을 채 열 대도 만나지 않는 길이다. 고갯마루에 다다르면 양쪽으로 갈라져 각각 다른 마을로 이어진다. 두 길 중 달빛마을로 가는 완만한 내리막길이 대체로 우리의 선택인데, 때로 급경사로 구불구불 가파르게 내려가 국도변에 닿는 맞은편 길로 접어들기도 한다.
어제는 국도변에 이르는 그 가파른 길을 걸었다. 구불구불 도로를 한참 내려가다 멈칫 걸음을 멈췄다. 산 아래 그늘진 도로 가득 얼음이 덮여 있었다. 영상 10도가 넘는 기후에 얼음이 남아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어쩐지 그곳까지 가는 동안 만난 차량이 한 대도 없었던 것에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고갯길 입구에 통행금지 팻말은 없었다. 급경사를 달려 내려오다 얼음길 앞에서 돌렸을, 차량의 바퀴 자국이 여러 개 보였다. 넓은 산기슭 쪽으로 차를 돌릴 만한 여유가 있어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다.
"이상하게 기분이 나아지네."
더 이상 갈 수 없는 길 앞에서 동생이 말했다.
"그러게."
나도 말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건 때로 안정을 주기도 한다. 더 갈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갈등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얼음길을 보기 전까지 우리는 내처 걸어 국도를 지나 좀 더 멀리 가 볼 것인가, 고개를 내려가면 바로 되돌아올 것인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얼음길 앞에 주저앉아 오래 걸어온 열기를 식힌 뒤 우리는 돌아섰다. 다시 구불구불 길을 오르던 중 고갯길을 내려오는 차량을 한 대 만났다. 그럴 필요는 없는데 나는 굳이 손 신호를 보냈다. '갈 수 없어요, 돌아서 가세요.' 두 팔을 교차해 엑스자를 지어 보였다.운전자가 속도를 줄여 창을 열었다. 동네 사람은 아니었지만 인근 주민으로 여겨지는 중년 남자였다.
"못 가요?"
운전자가 물었다.
"네, 저 아래가 얼음으로 덮였어요."
운전자는 그래도 확인이 필요한 지 천천히 운전해 비탈을 내려갔다. 우리는 차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걸었다.
"갈 수 있을까?"
동생이 말했다.
"괜한 모험을 왜 하겠어. 돌아서 올 거야."
내가 말했다. 잠시 뒤 다시 돌아오는 차 소리가 들렸다. 우리 곁을 지나가며 운전자는 속도를 줄이고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