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벌레 소리 가득한 가을, 어울리는 것은 역시 독서다. 지난 구월 브런치를 갓 시작했기에 한동안은 브런치 글만 읽었다. 화면으로 글 읽는 것은 사실 좋아하지 않았다. 기계를 켜 놓으면 안정이 되지 않는 사람이라 그런 것인데, 이제 브런치에 정을 붙일 마음에 이웃에게 관심이 갔다. 안정을 잃는 건 처음 얼마간이었다. 마음을 끄는 글엔 금방 몰입이 되어 종이든 화면이든 크게 상관이 없었다. 꽤 좋은 글이 많았다. 브런치 추천 글보다는 관심 있는 키워드를 넣고 찾아낸 글을 주로 읽게 되었다. 공감이 가면 가는 대로 아니면 아닌 대로, 마음이 채워지고 시야가 확장되어 좋았다. 특히 또래가 아닌 사람의 이야기는 다른 세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래도 어제는 비도 내리고 해서 종이책을 손에 들었다. 여름 내 쉬지 않고 비가 내리는 통에 그 좋아하던 빗소리를 외면하게 된 것이 섭섭하더니, 서늘해진 계절 빗소리가 다시 좋아진 게 반가웠다. 아무튼 오랜만에 다시 읽은 「곰스크로 가는 기차」. 몇 년 전 읍내 도서실에서 발견하고 단번에 매료된 책이다. 오죽하면 읽는 도중에 온라인 서점에 주문을 넣었다. 책이 절판될까 걱정스러웠고 한시라도 빨리 내 책장에 꽂아놓고 싶기도 했다. 되도록 새로운 것은 사지 않는 생활에서 드문 일이었다.
제목에도 끌렸고 겨자색이 들어간 표지 디자인도, 아담한 책 크기도 마음에 들었다. 속지가 재생지라면 더 좋았겠지만 두께가 얇은 편이라 손목이 아프진 않았다. 새로운 책을 만나면 이렇듯 겉모양부터 두루 살피며 두근두근 마음을 키운다. 이 속에 어떤 풍경이 숨어 있을 것인가. 편안하게 등을 기대고 앉아 따끈한 차 한 잔 곁에 두고, 손에 맞춤하게 잡히는 새로운 책 한 권을 들고 있는 것은 내게 최상의 상태다.
책 얘기로 돌아가 본다. 독일 작가 프리츠 오르트만이라는 작가가 쓴 단편소설이다. 평생 곰스크 말고는 다른 것을 원하지 않은 남편이 나오고, 곰스크로 가는 길목 간이역에 내려 안락의자를 들이고 꽃을 심으며 사는 것에 만족하는 아내가 나온다. 곰스크는 쉽게 짐작이 가듯 인간이 다다르지 못할 이상향에 대한 은유다. 이루기 힘들지만 평생을 놓지 못하는 꿈이라고도 볼 수 있다.
남편도 아내처럼 현실에 만족하고 살았다면 문제가 없다. “인생의 의미를 가지는 건 오직 자신에게만 달려 있다”라고 아내는 안타까워하며 남편에게 말한다. 삶의 태도를 두 부류로 나누자면 나는 가지 못한 곰스크를 평생 그리워하며 사는 남편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원하는 공간을 이루고 그 안에서 만족하는 아내 쪽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워낙 심층적이라 책 속의 인물이 아니고서는 그렇게 간단히 분리되지 않는다. 들여다보면 내 속엔 두 마음이 다 있다. 끝내 다다를 수 없는 곳을 향하는 그리움과 현실의 소소한 기쁨에 만족하고 안주하려는 마음.
내내 곰스크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며 사는 남편이지만 현실의 삶은 충실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머물 곳과 밥을 벌어 아내와의 생활을 이어나간다. 그와 함께 곰스크 특급열차를 타기 위한 경비 마련에도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지난한 과정을 거쳐 기차에 막 오르게 된 결정적 순간, 그만 기차에서 내려서고 만다. 자신이 애써 마련한 안락의자를 두고는 함께 가지 않겠다는 아내와 그 뱃속의 아이를 외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 뒤 마을의 하나뿐인 선생 직을 받아들여 겉으로나마 안락한 가정을 꾸려간다.
“당신은 작은 마을에 눌러앉아 부인과 아이와 정원이 딸린 조그만 집을 얻었어요. 그것이 당신이 원한 것이지요. 원하지 않았다면 기차가 정차했던 바로 그때 당신은 내리지 않았을 거예요. 그 모든 순간마다 당신은 당신의 운명을 선택한 것이지요.”
전임자인 늙은 선생은 그에게 말한다. 자신도 한때 곰스크를 꿈꾸었지만 이곳에서 머문 삶이 결코 의미 없는 게 아님을 깨달았기에 이제는 만족한다고. 전임자의 말을 남편도 아주 부정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끝내 곰스크를 떨칠 수는 없다.
“곰스크로 가는 특급열차가 저 멀리 돌진하는 소리가 들리고 그 찢어지는 듯 슬픈 기적소리가 초원을 뚫고 울리다가 멀리 사라질 때면, 갑자기 뭔가 고통스러운 것이 솟구쳐 나는 쓸쓸한 심연의 가장자리에 놓인 것처럼 잠시 서 있곤 한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이렇다. 아, 나는 이야기가 그렇게 맺어져 마음이 놓였다. 남편의 마음이 변해 곰스크를 잊고 현실에 안주했다면 나야말로 쓸쓸했을 것 같다.
나도 오래도록 바라던 것이 있었다. 산골 외진 곳에서 풍경에 묻혀 조용히 살아가는 것. 불가능한 꿈은 아니었기에 조금씩 다가들어 결국 바라던 곳에 도착했다. 일곱 해를 머물고 있지만 더 이상 가고 싶은 곳은 없다. 앞으로도 아마 그럴 것이다. 세상 끝에 온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이제 내게 곰스크가 없는 것인가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곰스크를 향한 그리움이 없다면 일상의 소소한 기쁨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소설 속 남편도 곰스크라는 열망이 없었다면 그토록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았을까 싶다.
소설집에 함께 실린 다른 일곱 작품에도 곰스크와 같은 메타포가 가득하다. 그런 응축된 삶의 의미를 굳이 찾아보지 않고 그냥 읽어도 좋다. 특히 마지막에 실린 작품 '럼주차' 같은 이야기는 특별할 것 없는 서사인데도 오래 기억에 남는다.
"프리슬란트 사람들은 차를 즐겨 마시며 럼주도 또한 좋아한다. 하지만 그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차에 럼주를 곁들인 럼주차다. 키가 큰 보이 엡센 역시 럼주차를 제일 좋아한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럼주차를 맛보기 위해 안개 낀 밤에 모래톱을 건너 동생네에 다녀오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바다엔 달이 떠 있고 썰물이 한창이다. 보이 엡센은 모래톱을 건너 동생네에 가서 미국에서 왔다는 차를 대접받는다. 하지만 럼주가 없다는 동생 처의 말에 그는 집으로 돌아오기로 한다. 럼주가 없이 차를 마실 수는 없고, 그의 집엔 차는 없지만 럼주는 있다. 차 한 꾸러미를 얻은 보이 엡센은 동생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안개 가득한 어두운 모래톱을 다시 건넌다.
모래톱 길은 풀덤불을 따라 나 있다. 주변은 푹푹 빠지기 쉬운 갯벌이다. 그 구불구불 이어진 모래톱 길을 따라 보이 엡센은 걸음을 옮긴다. 제시간에 출발해야 갯벌에 빠지지 않지만 아직은 늦지 않았다고 보이 엡센은 생각한다. 하지만 곧 축축하고 어두운 사방에서 물길을 따라 조류가 밀려드는 기이한 콸콸거림을 듣게 된다. 달의 인력이 점차 물을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바람과 조류가 맞서는 컴컴한 바다는 점점 격렬하게 넘실거린다. 물이 무릎까지 차오르고 압력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움푹 파진 곳에 발을 빠뜨리고 가슴께까지 물이 차오르자 그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멈춰 선다. 그리고 모자 속에 넣어두었던 파이프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다. 안개와 물소리로 가득한 어두운 바다에서 작은 난로 같은 파이프를 피우는 그를 달과 함께 서쪽으로 나아가는 배처럼 그려놓은 그 장면은 가히 압권이다. 얼핏 싱거운 서사 속에 달과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또한 그렇다.
"당신은 좋은 담배를 피우는군, 보이 엡센."
달이 말하고
"맞아, 아주 좋은 담배지."
보이 엡센이 대답한다. 둘은 한참 그런 식의 대화를 이어간다.
"자네는 무슨 일을 하나?"
"밀물과 썰물을 만들지."
"자네의 밀물은 짜군. 맛은 럼주차가 훨씬 낫지."
"아, 그래."
노란 얼굴의 달이 따뜻하게 그의 말에 대답해 준다.
책을 다시 읽는 나는 뻔히 결말을 알면서도 짙은 안갯속에서 차갑고 검은 바다의 철썩대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함께 발이 차가워지고 따끈한 럼주차를 간절히 마시고 싶어 진다. 이상스레 마음이 찡하여 프리슬란트에 사는 키 큰 보이 엡센에게 정이 푹 들어버린다. "잘 서 있으라고!" "이제부터는 썰물을 만들 테니까." 달이 말한 뒤 보이 엡센이 물에 푹 젖은 채 무사히 집에 도착해 아내를 만나는 장면에서는 또 마음이 놓여 뭉클하다. 드디어 보이 엡센은 아내가 끓여주는 럼주차를 마시게 된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차를 들고 문 앞에 나간 그가 달을 향해 잔을 들어 올리며 건배를 하는 순간엔 아, 하고 뱃속이 따뜻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