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김밥은 동생을 춤추게 한다

진보랏빛 가지가지 요리

by 구름나무

가지 수확을 했다. 끝물인데도 바구니에 담아보니 제법 양이 많았다. 봄에 모종 열댓 개를 키워 밭에 심은 뒤 지금까지 풍성하게 가지 요리를 먹고 있다. 올여름 긴 장마에 다른 작물들이 거의 녹아내릴 때도 가지는 큰 지장 없이 잘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꽃은 연보라색, 열매는 짙은 보라색. 매혹적인 색에 모양도 어찌나 탐스럽고 예쁜지 심은 보람이 넘치고도 남았다. 어떻게 요리하든 맛도 훌륭하니 더없이 고마운 작물이다.


가지로는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 수 있다. 가지 무침, 가지 볶음, 가지 구이, 가지 튀김, 가지 피자, 가지 덮밥, 가지 국수 등등. 어릴 때 엄마가 해주던 가지 무침으로 나는 처음 가지 맛을 배웠다. 찜통에 가지를 통째로 넣고 쪄낸 것을 젓가락으로 길쭉하게 여러 갈래 가른 뒤 집간장, 파, 마늘, 고춧가루, 들기름을 넣어 무쳐 주던 그 부드럽고 맵싸하고 향긋한 가지무침. 아버지가 잘 드시던 반찬이라 자주 밥상에 올랐다. 소식에 식성이 소박한 아버지가 좋아하는 반찬 셋을 꼽으라면 호박잎 듬뿍 넣은 된장찌개와 기름 없이 구운 파래김에 양념간장, 그리고 그 가지무침이었다.

네 남매 중 둘째인 내가 아버지 성향을 가장 많이 탔다고 가족 모두 인정하는데, 성향이 비슷하면 식성도 닮는 건지 나 역시 아버지처럼 그 세 가지 반찬을 즐겨 먹는다. 가지는 오직 가지무침으로만 드시는 아버지와 다른 점이라면 내 입맛은 약간 더 여유롭다는 것이다. 가지무침에 넣는 기름이 꼭 들기름이 아니어도 괜찮고, 조리 방식을 달리 해서 먹는 것도 좋았다. 피자나 샐러드에 넣는 가지는 올리브유로 굽기도 하고 볶음밥에 넣는 가지는 코코넛오일을 주로 사용한다. 찜기를 꺼내는 게 번거로울 땐 김밥 썰듯 동그랗게 잘라 프라이팬에 구워 먹기도 한다. 프라이팬에 담백하게 구운 가지는 수분이 적당히 날아가 졸깃한 식감에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힘도 시간도 들이지 않고 맛있게 한 접시 요리를 먹고 싶다면 가지구이! 강력히 권한다.


요리 과정이랄 것도 없지만 가지 구이를 잠깐 소개한다.

가지, 두부, 꾀리고추 구이

1. 뚜껑 있는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도톰하게 토막 낸 가지를 빼곡히 채운다. 2. 뚜껑 닫고 약한 불에 굽다가 노릿해지면 뒤집어 조금 더 굽는다. 3. 들기름과 천일염 섞은 것에 찍어 먹는다. 나는 네모난 양면팬을 이용하는데, 가지 다섯 개 정도는 너끈히 올라간다. 한꺼번에 구워 놓으면 샌드위치나 피자, 볶음밥에 응용해 먹기 좋다.


튀김을 좋아하는 동생을 위해서는 가지 튀김을 만드는데 굳이 튀김옷까지 입힐 것도 없고 기름을 낭비할 필요도 없다.

1. 원하는 두께와 모양으로 자른 가지를 냄비에 넣고 맛소금을 뿌린 뒤 뚜껑을 닫아둔다. 2. 가지에 물기가 조금 배어 나오면 감자 전분이나 밀가루 두어 스푼을 넣어 냄비 뚜껑을 닿고 흔들어 골고루 묻힌다. 3. 프라이팬에 기름 넉넉히 치고 굽듯이 튀긴다. 가지 구이나 튀김을 할 때 고추, 양파, 마늘 따위 다른 작물이 있다면 같은 방식으로 곁들여 구우면 서로 향이 배어 맛도 더 좋고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


특히 요즘처럼 밤낮 기온 차가 심한 가을철의 가지는 통통하게 살이 오르지 않는 대신 조붓하고 속이 단단해 주로 무침보다는 구이를 해 먹고 있다.

“얘네로 뭘 만들어 줄까?”

어제 마당 텃밭에서 가지를 거둘 때 동생에게 물어보았다.

“뭐 아무거나.”

동생이 말했다. 여름내 입맛을 잃어 몸이 축난 동생은 말도 살찐다는 천고마비의 계절, 여전히 먹는 것에 심드렁했다. 그래도 내가 누군가. 제 식성이야 꿰고 있으니 반짝 반응을 이끌어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김밥 어때? 가지 김밥.”

치즈를 워낙 좋아하는 동생이라 가지 피자라면 일단 환영하겠지만 그건 만들어 먹은 지 며칠 지나지 않았다. 이번엔 튀김을 해 줄까 생각하다 김밥 만들 생각이 났다. 색이 짙어 검은빛에 가까운 갸름한 가지가 꼭 김밥처럼 보이기도 했다.

“김밥? 가지로 김밥도 만들어?”

동생이 반색하며 물었다.

“그으럼. 대박 맛있어!”

동생의 반응에 맞춰 나는 구미가 당기도록 말했다. 가지 김밥! 사실 만들어 본 적도 먹어본 적도 없었다. 동생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 하면 또 치즈 요리와 어깨를 겨누는 게 김밥이다. 김밥이라면 속에 뭐가 들어가든 웬만하면 흡족해한다.

20201009_144841-1.jpg 텃밭에서 딴 아사기 고추, 가지, 부추, 파슬리

오래전 동생에게 치즈와 아사기 장아찌만 넣어 김밥을 말아 준 적이 있었다. 아사기는 할라피뇨처럼 생긴 살집이 통통하고 매운 개량종 고추인데 장아찌로 담으면 정말 매콤 아삭한 맛이 고추장아찌 중엔 으뜸이다. 하여튼 그때 김밥 하나를 입어 넣은 동생이 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순간 혀를 깨물었나 싶었다. 그런데 벌떡 일어나 팔을 휘두르며 지휘하듯 춤을 추는 것이 아닌가. 너무너무 맛있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것이다. 참고로 동생은 심한 음치에 몸치다. 14년간의 외국 생활을 접고 막 돌아왔을 때라 삭힌 것과 매운 것이라면 환장할 때이긴 했다. 그래도 그걸 먹고 어찌나 감탄을 하던지 큰 통에 담은 아사기 장아찌를 통째로 들려 보냈다. 일 년은 먹을 양이었다. 문제는 그 뒤였다. 두어 달 만에 아사기 몇 박스를 사들고 나타나 내게 장아찌 담는 법을 알려 달라고 했다. “그걸 벌써 다 먹었어?” 물어보니 그날부터 줄곧 아사기 김밥만 먹었다는 것이다. 동생이 직장에 다니고 있어 하루 한 끼 저녁만 집에서 먹을 때였다. 일을 하면서도 얼른 집에 가서 아사기 김밥 먹을 생각이 났다니 말릴 수도 없었다. 한 번에 보통 두 줄, 더 당길 땐 세 줄까지 싸서 시원한 맥주 한 병을 곁들여 먹는 걸로 피로를 푼다는 것이었다. 잠자리에 누워서는 어서 내일이 와서 또 아사기 김밥 먹어야지 생각하며 잠에 들었다고 했다. 무섭지 않은가! 뭐에 씐 듯 그렇게 하나에 빠지면 다른 것엔 눈도 안 돌리는 동생이다.


그 아사기 김밥을 동생은 꼬박 이 년이나 먹었다. 이 년 뒤엔 내가 살던 아파트의 같은 동으로 이사를 와 나는 4층, 동생은 9층에 살게 되었다. 그때부터는 내가 종종 반찬을 해다 날랐기에 드디어 아사기는 그 집요한 입맛에서 풀려났다. 그래도 아직까지 이따금 동생의 부엌에 가보면 질척한 밥 위에 가지런히 눕혀져 치즈를 한 겹 덮고 김에 싸여 있는 불쌍한 아사기의 꼴을 보게 된다.


나는 음식 재료를 보면 완성된 요리를 상상하며 함께 곁들일 다른 재료를 떠올리는 편이다. 가지 김밥엔 마침 냉장고에 들어 있는 두부가 떠올랐다. 두부엔 또 부추라 밭에서 부추도 한 줌 끊었다. 가지와 두부가 감칠맛을 내어 줄 것이고 부추는 김과 함께 그 둘을 포용해 풍부한 향미를 담당할 것이다. 가지와 부추가 마련되었으니 텃밭 재료 준비는 끝났다. 하지만 뭔가 미진해 텃밭을 미적미적 둘러보다 토마토와 파슬리, 고추를 따고 그 옆에 동글동글 무성한 잎을 한 손에 감아쥐고 뽑아냈다. 땅콩이 주렁주렁 딸려왔다. 우와! 땅콩인 줄 알고 뽑았으면서도 놀라고 말았다. 봄에 재미 삼아 처음으로 몇 알, 싹 내어 심어 본 것인데 저 혼자 열심히 자라주어 정말 볼록한 껍질까지 제대로인 땅콩이 되어주었다.


땅콩 냄비밥

재료 손질까지가 번거롭지 그다음부터는 재미난 놀이다. 불린 쌀에 땅콩과 감자를 올려 냄비밥을 하는 동안 양파와 토마토, 고추, 파슬리로 샐러드를 만들었다. 소스는 큰 스푼으로 식초 1, 설탕 1, 소금은 4분의 1, 올리브유 2. 다음은 양면팬을 꺼내 가지와 두부를 굽다 마지막에 부추를 넣고 살짝 익혔다. 김과 단무지도 꺼내고 밥은 고슬고슬 퍼서 한 김을 식혔다.


김밥 네 줄을 쌌다. 김밥을 썰어 두 접시에 나누어 담고 샐러드와 감자, 땅콩도 같이 곁들여 놓았다. 생각보다 화려한 색과 모양에 나와 동생은 행복해졌다.

“먹어봐.”

김밥 꼬투리 두 개를 집어 하나는 내 입에 넣고 하나는 동생에게 건넸다. 김밥을 맛본 동생 눈이 커지고 있었다. 엄지척이 나오더니 얼씨구! 팔이 올라갔다. 이런, 아사기 김밥 때 보았던 동생의 그 우스꽝스러운 지휘자 춤이 이젠 얼씨구로 바뀌었다.

내가 요리를 하는 까닭, 바로 이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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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2793110956.jpeg 동생을 춤추게 한 가지 김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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