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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나무 May 31. 2021

고라니 입맛 같은 나날

돌나물 비빔국수

  비가 잦아 돌나물이 자꾸자꾸 자란다. 몇 차례 훑어 먹었는데 어느새 또 앵두나무 그늘 아래 소복하게 올라와 있다. 돌나물. 이름이 예쁘다. 이름만큼 생긴 모습도 정갈하다. 키가 커진 걸 보면 곧 노란 꽃을 피울 것 같다. 소담히 모여 핀 것에 손을 뻗는다. 에고 미안해라.

앵두나무 아래 돌나물

   몇 년 전 냇가 음지에 있던 돌나물 몇 줄기를 뽑아다 마당 그늘에 꽂아두었다. 해가 지날수록 퍼져 이젠 마당 그늘이면 어디든 자란다. 몇 줄기가 수백 줄기가 되었다. 잦은 비에 텃밭 한 귀퉁이 미나리도 무성해졌다. 미나리는 지난 사월 읍내 마트에서 한 봉지 사 온 것을 퍼뜨린 것이다. 쪽은 먹고 밑동 한 뼘 정도 남겨 컵에 꽂아두었더니 뿌리가 났다. 물을 좋아하는 식물은 줄기만 물에 꽂아도 뿌리가 곧잘 난다.  미나리를 텃밭 움푹한 곳에 묻어둔 것이 한 달여 만에 제법 퍼졌다. 곁가지도 많이 뻗었고 파릇하니 여렸던 줄기는 불그스름 굵어져 야생 미나리 모습을 풍긴다.   


    정작 신경 써서 돌보던 다른 작물들은 시원찮다. 상추쌈 한번 어 보질 못했다. 오이며 가지, 고추는 오월 초에 냉해를 입더니 아직까지 비실거리는 데다, 비가 잦으면서 도무지 자랄 생각을 않는다. 작년 이맘때는 풍성하게 먹고도 남았던 쌈 채소들도 볕이 부족 더디 자랐다. 이제야 겨우 먹을 만해지나 싶었는데 비 그친 아침 몽땅 사라졌다. 동강 동강 통째로 베어 먹은 자국을 보아 분명 고라니 짓이었다. 며칠 전에도 탐스런 도라지 싹을 연한 윗부분만 다 끊어먹고 갔다. 끊긴 상처마다 하얀 진액이 맺혀 있었다. 이제 곧 볼록한 꽃봉오리가  나거였는데 거의 전멸이었다. 오, 보라색 흰색 너무나 어여쁜 도라지 꽃봉오리. 실망한 나머지 고라니가 남긴 싹 하나를 끊어 입에 넣고 씹어보았다. 향이 특별히 느껴지지 않는 그저 그런 순한 맛이었다. 고라니는 그저 그런 순한 맛을 좋아한다. 고라니의 입맛을 탓할 순 없다. 귀여운 얼굴을 하고선 밤이면 괴상한 소리를 지르 골짜기를 내달리는 녀석. 웩-웩- 상당히 고약하면서도 외로운 소리라 처음 산골에 와서 들었을 땐 어떤 성질 사나운 짐승이 다쳤나 했다. 고라니 소리라는 것을 알게 된 뒤에는 심상히 듣고 있지만, 도무지 그 생김새와 일치가 되지 않는다. 마당까지 나타나는 일은 드문데 무슨 사정인지. 고라니는 기억력이 좋다. 한 번 입을 댄 곳은 다시 먹을 만해질 때를 놓치지 않고 찾아온다. 마당 비탈 아래 팔백 평 밭을 일구던 시절, 순한 잎채소들은 늘 고라니의 식사가 되었다. 번번이 골탕을 먹은 뒤 고라니가 좋아할 작물은 덜 심게 되었다. 고작 삼 년 만에 허리에 문제가 생겨 이제 팔백 평 밭은 일구지 않는다. 밭 가장자리 길가에만 부엽토를 긁어모아 호박 모종 스무 주 남짓 꽂아 두었다. 수년간 그냥 내버려 둔 밭은 갈대가 무성해지고 온갖 나무가 자라면서 꿩의 서식지가 되었다. 번식기인 이른 봄엔 영역을 지키는 수컷 소리가 꿩-꿩 거칠게 울리더니 요즘은 좀 잠잠해졌다. 비탈길 오갈 때면 그래서 조심스럽다. 꿩 암컷이 한창 알을 품고 있을 시기다. 갈대숲으로 변한 그 밭은 고라니가 항시 다니는 길목이기도 하다.  


   사방이 숲인데 왜 집 마당까지 오시는가. 고라니에게 따질 수도 없고, 이젠 텃밭에도 순한 잎채소는 덜 심게 될 것 같다. 고라니가 안 먹는 건 깻잎, 바질, 겨자채, 루꼴라처럼 향이 한 채소다. 뿌리만 남은 상추 밭 옆의 미나리 역시 한 줄도 안 드셨다. 돌나물은 연하고 순한 맛인데도 그늘에 숨어 있어서인지 건드리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다. 루꼴라 한 줌 따고 미나리 두 줌 따고, 돌나물은 반 소쿠리나 땄다. 고라니가 거들떠보지 않는 루꼴라를 오매불망 기다린 동물이 우리 집엔 있다. 아실만한 분은 아시겠지. 내 동생이다. 올해 첫 루꼴라를 땄으니 당연히 오후엔 루꼴라 피자를 먹을 것이라 기대하는 눈치였다. 흠, 반전이다. 루꼴라는 내일 먹고 오늘은 돌나물 비빔국수를 만들어야지. 심심한 산골 생활 이런 것도 반전이 된다.        


  돌나물 비빔국수 만들 준비를 했다. 돌나물은 살살 씻어야 한다. 여리고 가벼워 살살 씻게 된다. 마지막 헹굴 땐 식초를 넣어 잠시 담가 두었다 건져냈다. 물기가 빠질 동안 초고추장을 만들면 된다. 초고추장을 만들 때는 직접 만든 들풀 효소와 과일 식초가 큰 몫을 한다. 들풀 효소는 먹을 수 있는 풀들을 뜯어와 큰 유리병에 담고 설탕과 소주를 부어 놓은 것이다. 달맞이꽃, 민들레, 제비꽃, 냉이, 까치수염, 고들빼기 같은, 들에서 한 줌씩 꺾어온 풀을 잘게 잘라 넣고 그때마다 설탕과 소주를 추가한다. 설탕은 듬뿍, 소주는 방부제용으로 조금만 붓는다. 과일 식초 만드는 것도 비슷하다. 먹고 남은 과일이 있을 때면 잘게 잘라 병에 넣고 식초를 붓는다. 작년에 사과와 단감, 포도 세 가지 종류로 담아 놓았다. 셋을 다 섞어도 된다. 고추장 한 술에 들풀 효소 한 술. 사과 식초 한 술을 넣어 초고추장을 만들었다. 새콤하고 달달하고 매콤했다. 초고추장 맛을 보느라 씻어놓은 돌나물을 몇 개 집어 먹었다. 멈추지 못하고 연이어 먹은 게 한 대접은 되었다. 고라니 어째 구 먹는 기분이었다. 이제 국수만 삶으면 었다. 국수를 삶기 전 루꼴라는 씻어 냉장고에 넣어두려고 했다.        


  반전은 그리하여 실패했다. 루꼴라를 씻다 보면 그렇게 된다. 그 낡은 천에서 풍길 것 같은 묘한 향을 맡으면 당장 먹고 싶어지는 것이다. 루꼴라 맛을 아는 사람이라야 이 말을 이해하시겠지. 반전은 역시 쉬운 게 아니다. 할 수 없이 냉동실에 얼려둔 피자 도우와 바질 스토를 꺼냈다. 감자와 양파는 채 썰어 볶았다. 얇은 도우 위에 바질 스토 토마토소스를 바 뒤 감자와 양파 볶은 걸 피자치즈를 렸다. 맛의 포인트는 고추. 매운 베트남 고추를 가늘게 썰어 피자치즈 위에 렸다. 루꼴라는 생으로 곁들여야 한다. 치즈와 함께 구워진 매운 고추와 고소한 생 루꼴라의 조합이 내 루꼴라 피자의 핵심이 된다. 동생을 불러 함께 피자를 먹었다. 오랜만에 먹은 맛깔스러운 별식. 동생도 나도 감탄을 아끼지 않고 순식간 먹어치웠다.


  맛있게 먹었으면 만족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세상사가 그렇듯 적당할 때 멈추게 되지 않는다.   

  “마무리는 매콤한 돌나물 비빔국수 어때?”  

  빈 접시를 보며 나는 재빨리 결정을 내렸다.

  “와우 최고지!”  

   반전을 알길 없는 동생은 순진하게 감동을 했다. 국수를 삶아 신속히 돌나물 비빔국수까지 만들어 먹었다. 만족스러운 마무리였다. 더 이상은 어떤 별미도 사양. 뿌리만 남은 상추도 꽃봉오리 피우지 못하는 도라지도 잊을 수 있었다.


   밤엔 또 비가 내렸다. 비 오기 전 바람은 태풍처럼 요란하다. 무슨 일의 전조인가, 마음은 불안해진다. 비와 바람을 이젠 서정적으로 느끼기도 쉽지 않다. 예측하기 힘든 대기 불안정과 미세먼지와 바이러스의 시대, 어둠 속 몰려오는 빗소리 때로 불하게 여겨진다. 그래도 날이 밝으면 일상은 여전하다. 밭일을 하고 약간의 먹을거리를 뜯어와 밥상을 차린다. 고라니의 입맛처럼 그저 그렇게 순한 일상. 잦은 비에 텃밭 작물은 힘겨워도 돌나물과 미나리는 거뜬히 자랄 것이다. 살만한 환경을 만나야 기세를 펴는 자연의 생명들. 동생도 나도 살만한 곳을 찾아온 것이겠지.    


    

생 루꼴라를 곁들여 먹는 루꼴라 피자

    

돌나물 듬뿍 비빔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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