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름나무 May 06. 2021

벼랑 위 취를 꺾어 바치오리다

소쩍새와 야광나무 꽃

   밤마다 소쩍새 소리가 들려온다. 깊은 밤 깊은 숲에서 우는 소쩍새. 새는 모습이 아닌 소리로 정이 든다. 만난 적 없어도 왔구나, 반기게 된다. 소쩍새는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지에서 사월 말경 우리나라로 온다고 한다. 무르익은 봄에 날아와 짝을 만나고 새끼를 내어 여름을 보낸 뒤 가을이면 떠난다.       


   소쩍소쩍, 소리엔 배고픈 시대의 이야기가 스며있다. 고통스러운 시기 그 소리를 빌어 슬픔을 노래하기도 . 김소월의 접동새’, 서정주의 귀촉도가 그렇다. 배고프고 한스러워 더욱 잠들 수 없는 밤, 고즈넉한 소쩍새 소리는 정한을 띄울 만하다. 소쩍새를 다음 사전에서 찾아보면 소쩍소쩍혹은 소쩍다 소쩍다하고 우는데, 그 소리가 매우 처절하다고 나와 있다. 소쩍새 입안이 붉어 마치 피를 토하듯 운다고 옛사람들은 표현하기도 했다. 지금은 배고픈 시대도 아니고 핍박받는 시대도 아니어서 내 귀엔 그리 들리지 않는다. 애절하기보다는 소쩍소쩍, 깊은 밤 깊은 숲이 내는 고적한 숨소리 같다. 달빛을 항아리에 소복소복 채우는 느낌도 있고, 하얀 꽃망울이 살며시 부푸는 소리로도 들린다. 소쩍새 소리에서 내가 떠올리는 건 달빛 속 소담하게 핀 하얀 야광나무 꽃인 것이다.          


   소쩍새가 찾아오면 어김없이 야광나무 꽃이 핀다. 우리 집 근처엔 커다란 야광나무 두 그루가 있다. 비탈길을 내려가 우물 뒤에 한 그루, 우체통이 있는 울타리 곁 개울가에 한 그루. 볕이 잘 드는 개울가 야광나무가 먼저 꽃을 피우고, 우물 뒤 야광나무는 며칠 늦게 꽃잎을 연다. 올해도 소쩍새 소리를 들은 다음날 야광나무 환한 꽃을 개울가에서 만났다. 소쩍새와 약속이라도 한 것 같았다. 바로 전날 그 앞을 지나칠 때만 해도 꽃을 보지 못했다. 키가 큰 나무라 평소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무성한 초록 잎 사이 조롱조롱 꽃봉오리가 달릴 때도 미처 알아채지 못한다. 날마다 새로 피어나는 것들로 무성해지는 봄의 숲. 환하게 꽃잎이 열려 잎사귀를 가릴 때야 눈길을 끈다. 가지마다 늘어진 꽃송이를 따라 고개를 젖히면 커다란 나무 전체가 온통 하얀 꽃으로 뒤덮인 걸 보게 된다. 굉장하구나, 싶지만 은은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조용히 감탄한다.        


  야광나무 꽃은 향기도 느낌도 은은하다. 밤에 보면 달빛을 모은 것 같다는 야광나무 꽃. 한동안 집에서도 그 향과 빛깔을 누릴 수 있다. 개울가를 지나칠 때마다 늘어진 꽃줄기를 솎아온다. 좁은 농로라 어차피 길을 터야 해서 한 아름 꺾어도 덜 미안하다. 해마다 그걸로 동생은 생색을 낸다.   

  "언니에게 꽃을 바치노라."   

  꺾은 꽃줄기를 보기 좋게 모아 모두 내게 건넨다. 꽃 같은 것엔 별 감흥 없는 동생이다. 먹을 수도 없는 것을 굳이 집에 들여 귀찮게 물 갈아주는 걸 한심하게 여기는 일면도 있다. 그래도 꽃 좋아하는 나를 존중해 올해도 야광나무 앞에서 호기롭게 말했다.  

  돌아올 때 꺾어줄게.”   

  숲 고양이 밥 주러 가는 길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약간의 변수가 생겼다. 길가 벼랑 위에 소담히 돋은 취를 발견한 것이다. 그냥 지나치기엔 탐스러웠고, 올라가자니 귀찮았다. 그리 가파른 벼랑은 아니지만 쉽게 손이 닿는 높이도 아니었다. 산골에 갓 도착했을 땐 더 높은 곳까지 올라 다니며 취를 땄다. 이제는 확실히 심드렁해졌다. 그리 높지 않은 벼랑이라도 취 몇 잎 따자고 올라가게 되지는 않는다. 그만두자는 내 말이 오히려 동생의 기분을 부추겼다.  

  “꽃 대신 따다 줄까?  

  야광 꽃이냐 취냐, 선택하라 했다. 둘 중 하나여야만 가치가 있단다. 유유히 걷던 길거리에서 나는 생각지 못한 기로에 섰다. 꽃을 받을 것인가 취를 받을 것인가는, 묘하게 신경 쓰이는 문제다. 꽃을 선택하면 이상만 좇는 것 같고 취를 선택하면 배만 채우는 기분이랄까. 심보가 고약한 동생이다. 툭하면 이거냐 저거냐, 선택지 주는 걸로 재미를 삼는다. 무시해도 그만인 아주 같잖은 것들인데 잠시 심각하게 고민하게 된다. 결국 취를 선택했다. 꽃이야 언제든 어렵지 않게 꺾을 수 있었다. 벼랑에 반쯤 오른 동생은 몸을 뻗어 취를 꺾었다.

   수로 부인이 된 거 같아.”   

  동생이 내미는 취를 받아 들며 나는 말했다.  헌화가*의 한 대목이 마침 떠올라 생각보다 기분이 삼삼했다. 누군가 내게 뭘 바친다면 아무래도 벼랑 정도는 올라야 기분이 나는 것이다. 동생이 바친 취로 그날 오후 맛있는 한 끼를 먹었다. 기분 때문인지 지금까지 먹은 취 중 가장 향이 짙었다. 야광나무 꽃은 내가 직접 몇 줄기 꺾어 집안 여기저기 꽂아두었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건 인간만일까. 깊은 밤 소쩍새 소리 들으며 생각했다. 새들의 울음도 꽃이라 할 수 있겠. 초목이 꽃을 피워 열매를 맺듯, 새들은 울음으로 짝을 불러 후손을 낸다. 꽃 피고 새 우는 것에 인간이 정취를 느낀다면 저들이 있어 내가 살고 있다는, 의식 저편에서 오는 아름다움일 것이다. 

  소쩍새 날아오고 야광나무 꽃도 피었으니 이제 여름이 머지않았다. 온갖 초목이 본격적으로 뻗어가는 시기. 인간의 손을 빌어 자리 잡은 철쭉과 황매가 당당히 피어나는가 하면, 인간의 손을 빌지 않아도 풀숲 애기똥풀은 빈틈마다 노란 꽃을 띄운다. 유구한 세월을 지나온 쇠뜨기는 원시의 모습으로 기품을 세우고, 노련히 땅속을 점령한 찔레는 거침없이 세력을 넓힌다. 식물의 기세와 연대해 온갖 곤충과 동물도 저마다 살아갈 힘을 기른다. 각자 살아가지만 결국 함께 나아가는 것. 아름다움이란 생존 그 자체인 모양이다.     


  *헌화가

은 바위 끝에

암소 잡은 손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수로부인이 절벽 위 꽃을 원하는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때 웬 암소 끌고 가던 노인이 꽃을 꺾어 이 노래와 함께 바쳤다는 신라시대 향가.)


벼랑 위 취를 꺾어...내게 내밀어 보이는 동생
동생이 꺾어 준 취로 맛있게 차린 밥상
동생이 야광나무 꽃을 솎아주고 있다.
풍성히 솎아 온 야광나무 꽃


이전 05화 마당 아몬드 나무의 비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