덤으로 살았던 그 몇 주
처음 병원을 찾았을 무렵의 나는 편견 덩어리였다. 일단 병원을 아주 무서워했었다. 진료를 받으러 가면서 '어쩌면 이곳에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다. 정신과에서 다루는 증상이 다른 곳과 다르다 보니 그 생각은 맞을 때도 틀릴 때도 있었다. 아직도 기억이 나는 모습이 둘 있는데, 하나는 병원 문턱을 넘자마자 '여기 병동 폐쇄병동이에요?'라고 묻던 중년 부부였고, 하나는 내가 대기실에 앉아있는 내내 눈물을 흘리다가 내가 진료를 받고 나왔더니 본인 앞에 있던 약봉투를 모두 뜯어 복용한 다른 환자의 모습이다. 아마도 저 사람은 도와달라는 말을 그런 식으로 하고 있는 모양이라고, 감히 짐작만 했다. 만약 정말로 떠나고 싶었던 것뿐이라면 도와줄 사람이 잔뜩 있는 병원의 대기실보다는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을 택했을 테고, 애초에 이 병원은 여차하면 위험한 목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만한 양의 약을 처방해 주지 않는다. 시중에 판매되는 수면제를 아무리 많이 먹어도 위장만 상할 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힘든 것과 비슷하다. 처음의 나는 그 사람 앞에 놓인 여러 개의 약봉지를 보고 뜨악했지만-표정으로 보아하니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같은 마음인 듯 보였다.- 어쩌면 저 사람 나름대로, 취할 수 있는-어디까지나 그 상황에서-최선의 구조 요청이었는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치료의 시작을 기점으로 세상을 보는 시각이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오늘 할 이야기는 세상을 보는 시선의 변화를 깨달을 기운도 내어 놓기 힘들었던 시기의 이야기다. 그땐 정말 뭘 해도 조금은 섭섭하면서 개운한, 마지막을 향해 한 걸음씩 디디는 사람의 마음으로 해나갔다. 우울증이 심각했을 땐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임에도 나가기가 싫어서 오열할 지경이었는데 신기하게도 '가기 전에 친구들 얼굴은 봐야지'라는 생각이 들면 발걸음이 떼어졌다. 안 우울한 척 하기는 별로 어렵지 않았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속을 하얗게 태우고 한 송이씩 스러져 간 그 사람들은 모두 이 길을 걸어 무로 돌아간 거겠지, 생각하니 이상하게 가뿐했다.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수능이 끝난 후 교과서를 가지러 교실에 간 기분과 비슷하다면 비슷할까, 내가 할 일은 다 했고 이제 '좋은 마무리'를 위해 덤으로 주어진 몇 주만 더 보내면. 그러면 이제 정말 쉴 수 있는 거 아닌가.
당연한 말이지만 우울증이 절정을 찍었던 시기의 나는 정말 지금과는 달랐다. 다른 것들도 별로 괜찮지는 않지만 특히 난감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자살을 향한 충동이었다. 정말 하잘 것 없는 생활 속의 애로사항도 '죽어야지, 빨리'로 귀결되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지라 처음엔 이렇게 쉽게 놓아버린다는 선택지를 생각하는 내가 무서워 견딜 수가 없었는데 결국 나중엔 익숙해졌다. 일부러 자신에게 못되게 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서 적응하지 그래? 한두 번 마주할 상황도 아닐 텐데 말이야.'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 목소리에는 끝내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했다. 어차피 약 덕분에 이런 부정적인 생각이 지속되지는 않으니까, 지금 같으면 그 모든 나쁜 생각에 '어, 조까'라고 외쳐주었겠지만 당시엔 그럴 정신도 없었다.
그 과정에서 어떤 혼란을 느꼈다. 이상하다고, 이제 몸도 다 자랐고 세상이 어떤지 나름대로 맛보기도 했는데. 여기 와서 해야 할 것들은 대충 다 한 것 같은데? 왜 아직 살아있을까. 내가 뭘 실수했을까?라고 이 평균수명 100세의 시대에 말도 안 되는 고민을 진지하게 했다. 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온 세상의 허망함을 형체로 바꿀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담아둔 주머니에 불과했다. 아니, 진짜 주머니라면 그 허망함에서 오는 시림을 느끼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나는 주머니도 인간도 되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폐부를 찔러 오는 시린 기운에 괴로워하며 이불 밑으로 숨어들었다. 당시 먹던 브린텔릭스 부작용 때문에 육체적으로도 많이 힘들었지만. 당시에 그나마 생산적이며 안정적으로, 합리적인 판단을 지속할 수 있는 주제가 자신의 죽음뿐이었으니, 끔찍하게 외롭고 비참했다. 나는 주머니였다. 의지와 방향을 상실하고 무의 바다를 표류하는 허망함의 주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