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번째

걱정하지 마세요, 아픈 건 마음이 아니라 배니까요!

by 체리
KakaoTalk_20180603_231008301.jpg 수박주스를 아예 먹으면 안되는가보다

그랬다, 배가 아팠다. 아니 지금도 아프긴 아프다. 예전엔 아이스크림을 다섯 개씩 먹어도 끄떡없었던 나인데 프랑스에서 돌아온 후로 배앓이가 잦다. 이것이 나이 듦인가 아니면 석회 물이 체질을 바꾼 것인가.. 이번 주는 뭐라도 그려서 올리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세로 그림도 괜찮은 것 같다. 핸드폰으로 찍어서 바로바로 올릴 수 있는 것도 좋고. 온 몸을 지배한 게으름이 '사람들은 니가 2주를 쉬어도 모른다고!!'라고 속삭였지만 연재 중인 주제가 주제인 만큼 2주나 말없이 쉬면 혹시라도 걱정을 끼치는 일이 생길까 봐 붓펜을 들었다. 마음이 아니라 배가 아픈 거니까 걱정은 안 하셔도 된다고 말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들었다.

KakaoTalk_20180603_231007859.jpg 코딱지 히히

히히 코딱지..!! 나는 유난히 코딱지라는 말의 발음을 좋아한다. 파열음들이 부드러운 발음으로 마무리되는 게 마음에 들기도 하고 남녀노소 이 말만 들으면 피식 웃게 되는 것도 좋고. 아, 그러고 보니까 요즘 유난히 코딱지가 실해졌는데 그건 나만 그런 건가요. 문제의 배앓이는 1주 동안 앓고 나니까 좀 좋아지길래 오늘은 만용을 부려 다시 아이스크림에 손을 댔는데 역시는 역시다. 애인도 엄마도 한숨을 쉬면서 나무랐는데 나는 커피도 담배도 안 피우니까 아이스크림을 끊으라는 건 좀 너무한 말이다.

KakaoTalk_20180603_231008959.jpg 표류할 뿐 목적지에 닿지를 못한다

최근 잠을 잘 못 잔다. 내가 어려서부터 몸도 약하고 공부도 뛰어나지 못하지만 남들보다 탁월하게 잘하는 게 두 가지, 아이스크림 많이 먹기와 잠자기였는데 문제가 이 정도면 심각하다. 지난 1주일은 배도 아팠지만 몸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빨간 반점으로 올라오는 알레르기를 잠재우느라 좀 멀리 떨어져 있는 피부과를 열심히 다닌 탓에 알레르기 약과 렉사프로, 거기에 생리통을 잠재울 진통제까지 약 세 종류를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거기에 정로환을 불규칙적으로 추가했다, 웩). 새벽 다섯 시에 눈을 떠 졸음도 달아나던 차에 시선을 돌리니 내 방의 하얗고 키 큰 책장 위를 기어가는 손바닥만한 거미가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산 근처에서 나고 자라서 새끼손가락 두 개를 합친 것만 한 거미는 봤는데 이번엔 정말이지 손바닥 만한 거미가. 상황이 인식되자마자 손을 뻗어 불을 켰는데 거미가 사라지고 없지 뭔가. 1년에 한 번 쓸까 말까 한 핸드폰 손전등 애플리케이션까지 켜서 좁디좁은 책장 뒤까지 이 잡듯 뒤졌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서 슬펐다. 정말로 타란튤라 거미가 내 방에 있다면 그나마 내가 줄 수 있는 덜 징그러운 먹이를 주문해서 먹여 살릴 의사가 있었는데. 이것도 인연이지 않은가, 그것도 아주 대단한. 내가 어디 가서 유기 거미와 만나보겠는가. 아무튼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도 책장 위와 뒤를 열심히 뒤졌지만 역시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아마도 헛것을 본 모양이었다. 헛것을 보는 것도 머리털 나고 처음인지라 얼마간은 꽤나 흥분을 했는데 냉정해진 지금은 '기왕 볼 거면 제일 좋아하는 영화배우 같은 이미지를 보고 싶었는데..'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 좀 낭만적이라고도 생각한다. 나는 이제 '그 거미는 그곳에 존재하며,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을 한 음절 한 음절 자전적으로 발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타란튤라 거미는 별로 빠르지-적어도 내가 불을 켜는 동안 쏙 숨어버릴 만큼은- 않고, 바퀴벌레와는 달리 좁은 틈새에 자신을 압축해서 미끄덩미끄덩 지나다니는 재주 같은 것은 없다. 게다가 그놈들이 내가 쳐다보는 것까지 감지해서 어디 숨을 대단한 처세술을 익혔는지도 의문이다. 그리고 이 방은 내가 귀국하기 전까지 엄마가 썼던 만큼 길 잃은 거미가 우연히 내 방에서 지친 몸을 쉬게 되었다는 스토리 흐름에는 개연성이 부족하다. 따라서 합리적인 판단 하에 내가 헛것을 봤다는 결론을 내리긴 했지만 내가 먹은 약들은 관점에 따라서는 유니클로에서 살 수 있는 흰색 무지 티셔츠보다 더 평범한 약들인데(렉사프로와 아세트 아미노펜과 항히스타민제) 이것들의 만남이 나라는 사람에게 허상을 보게 만들 수 있는 걸까, 라는 의문이 생긴다.


싸구려 필라이트 맥주로도-멋대가리는 좀 없을지언정- 코가 비뚤어지게 취할 수 있고 흔하디 흔한 약 세 가지로 무에서 통통한 거미 한 마리의 허상을 창출할 수 있다니. 나란 사람은 꽤나 경제적인 존재가 아닐까. 하지만 기왕 볼 거면 좀 더 멋있는 것을 보고 싶다. 공룡이나 용이나 이번 주 복권 번호 같은 것.

KakaoTalk_20180603_231014781.jpg 일상은 조명 밖에 있으니까

15분만 지나면 새로운 한주가 시작된다. 1주는 멋대로 쉬고 다른 1주일은 아주 긴 변명으로 연재를 대신하게 되어 면목 없다. 몸 상태만 보면 한국에 들어와서 제대로 회복에 전념해야 하는 시기였다는 것과 별개로 한국 집에 돌아오기로 한 결정은 어디로든 방향성을 가지고 흐르던 일상이 한 곳에 고이게 만들었다. 시간도 감정도 굳이 갈 곳을 찾으려 하지 않고 내 주위에 고인 듯 보낸 2주일이었다. 다음 주에는 어떻게든, 못생긴 물길이나마 내 보았다고 말할 수 있는 한주를 보내고 싶다. 그리고 열한 번째와 완만하게 이어지는 연재 분도 가져올 테니, 일주일만 더 기다려 주세요.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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