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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리 Nov 20. 2021

르몽드와 나

신문 사는 게 어려울 줄이야.

TV를 잘 보지 않는다. 프랑스에 온 뒤로는 집에 TV가 없어서 그렇고, 가끔 한국에 들어가도 다른 할 일들이나 밀린 드라마를 몰아 보느라 TV 앞에 앉아있는 일은 조카를 보다가 지쳐서 누워있을 때를 제외하면 별로 없다-이렇게 말하면 아이를 열심히 보는 것 같지만 보통 조금 놀다가 누워서 환자놀이를 하자고 한다-. 입력량이 적어서 그런가 가끔 오래 지나도 기억에 선명한 장면들이 있다. 개그맨 김수용 씨가 딸의 성년식 선물로  딸이 태어난 날 사모은 다양한 신문사의 신문들을 줬다는 이야기가 그중 하나이다.


 이 이야기는 정말 인상깊었고, 물질적인 것보다 추억을 중요시하는 다니엘에게도 먹힐 전략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작년 다니엘의 생일에 진짜 선물과 함께 그날의 신문을 주기로 마음 먹었다. 나는 다니엘보다 생일이 2주일 빠르다. 그래서 연습도 할 겸 내 생일에 나온 신문을 사러 르몽드를 달라고 했다. 이상하게 그날따라 가판대에 르몽드가 없었다. 아저씨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신문을 한 부 줬고, 나는 의심이라곤 없이, 그게 정말 르몽드지가 맞는지도 확인하지 않고 집에 들고 왔다. 나는 신문부터 내려놓고 손을 닦으러 갔다. 물소리를 뚫고 다니엘이 뭘 사온 거냐고 물었다. 아니 방금 르몽드지 산다고 나갔다 왔는데 그럼 뭘 사왔겠니. 생각하며 거실로 나가자 내 입에서도 뭘 사온 거냐는 말이 절로 나왔다.


 아저씨도 참, 르몽드지가 없으면 없다고 말할 일이지 멋대로 다른 신문을 준 것이었다. 내가 이날 사온 신문은 Le journal du dimanche, 일요일에 나오는 신문이었다. 다니엘 말로는 프랑스 내에서 어용 언론 취급을 신나게 받고 있는 듯했다. 신문이라기 보다는 관보라고 불러야 할 만큼 정부 입장을 그냥 불러주는 대로 받아쓴다나. 다니엘은 '르몽드는 정오부터 팔아' 라고 했다. 여기서 나는 또 한 가지 착각을 하게 된다. 정오에 당일 신문이 나오는 시스템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조간 신문에 익숙했던 나는 무슨 놈의 신문이 그렇지? 라고 생각하면서 다니엘의 생일날 신문을 사러 나갔다. 그리고 내가 사온 신문을 받은 다니엘은 다시 한번 빵 터졌다.


 이번엔 르몽드지를 잘 사왔지만 날짜가 틀린 거다. 알고 보니 정오가 지나서 나오는 신문은 내일 신문이란다. 학교에서 공부한 과목과 내가 일상에서 저지르는 실수는 별로 상관이 없지만 우습게도 내 석사학위는 저널리즘 학위다. 혹독한 실수로 배운 덕분에 요즘은 사고 싶은 신문을 잘 사고, 가판대 주인을 맹목적으로 믿지 않는 의심꾼으로 성장했지만 이날을 생각하면 아직도 얼굴이 후끈거린다. 무슨 놈의 신문 사는 게 그리도 어렵단 말인가.


 프랑스어를 공부하면서 가장 간절했던 것은 쫄지 않을 용기였다. 사람들 앞에서, 또는 마주한 글 앞에서 쫄거나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게 아주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전보다는 많이 좋아졌다. 신문을 꼭 읽고 싶다는 것 역시 이 바람의 한 갈래였다. 다니엘은 굳이 놀리려고 말했던 것이 아니지만 언젠가 (또!) 신문을 잘못 사왔을 때(이때 사온 것은 한달에 한번 나오는 르몽드 디플로마틱이었다. 매일 나오는 신문 치고는 너무 비쌌지만 파리 물가가 런던을 쫓아가려고 이러나? 이상의 의문을 품지 않았다.) 다니엘이 '이건 너무 어렵지 않아? 프랑스 사람한테도 쉬운 읽을 거리가 아닌데.' 라고 했던 것이 이상하게 오기를 자극했다. 다른 언어를 배울 때는 신문이라는 존재가 그렇게 특별히 와닿지 않았는데 프랑스어는 공부할 때 너무 고생을 해서 그런가 신문만 읽을 수 있으면 기분이 정말 좋아질 것 같았다.


 막연하게 '프랑스어를 잘 하게 되는 것' 에서 시작한 목표가 점점 다양한 가지로 뻗어나가 결국은 '신문을 읽게 되는 것' 이라는 구체적인 목표로 발전했을 때, 그 순간의 나는 내가 일종의 결실을 맺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약간의 거리를 두고 내가 맺은 매실만한 열매를 구경하는 건 정말 짜릿한 일이다.


 앗, 이야기가 프랑스어 쪽으로 튀니 반가운 소식이 떠올랐다. 2020년 5월 7일에 올린 '경쟁은 아니지만 신경은 쓰여' 에서 언급한 나의...나의 시누이의 남편(올바른 명칭은 서방님이라고 하지만 영 입에 붙지 않는다)인 호세를 기억하시는지? 며칠전 할머니 댁에서 여동생 부부와 만난 다니엘-이날 나는 가지 않았다-은 호세의 프랑스어가 일추월장했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매일 직장에서 프랑스어로 소통하고, 또 정부에서 제공하는 프랑스어 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하면서 이제 그는 하고 싶은 말을 유창히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나는 호세가 해냈다는 사실이 무척 기쁘면서 다음 크리스마스 가족 모임이 맹렬하게 걱정되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도 어른들 앞에서는 부끄러움이 앞서 더듬더듬 말하는 판국인 것이다. 다니엘은 이 조바심이 내 부끄럼증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 기대하고 있지만 글쎄 어떨지... 나는 이번 크리스마스에 후회를 남기지 않고 섞여들 수 있을까?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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