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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리 Nov 06. 2021

저도 배부를 권리가 있잖아요

프랑스에도 눈치가 존재할까? 

연애를 시작했던 시절부터 다니엘은 '레스토랑에서' 음식 남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자신을 물론이고 남이 음식을 남기는 것도 싫어하는 사람들을 적지않게 봤기 때문에 '음식을 남기는 걸 싫어한다'는 자체는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집에서는 괜찮다가 왜 레스토랑에만 가면 배가 부른데도 불구하고 내가 남긴 음식까지 다 먹는지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짜증이 났다는 것은 절대 아니고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먹는지 잘 모르겠지만 조금 안쓰럽다고 생각했다.

 실마리는 천천히 풀렸다. 사귄지 1주년이 다 되어갈 때쯤 몽생미셸에서 정말 맛없는 오믈렛과 조우한 날이었다. 나는 프랑스라는 나라가 가진 이미지 때문에 아무리 관광지에서 맛없는 레스토랑에 발목을 잡히더라도 일정 수준은 되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살면서 이렇게까지 맛없는 오믈렛은 처음이었다. 나는 요리를 시작한 이래로 계란 요리가 가장 안정적인 맛을 약속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는데, 이 오믈렛은 끔찍할 만큼 느끼하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맛들이 정말 조금씩, 그리고 유령처럼 부유하고 있었다. 뭘 너무 넣은 게 화근이었는지 아니면 조미료를 너무 안 넣은 게 문제였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나는 이것이 계란에 대한 모독이라 생각해1/4정도를 먹은 이후로는 손도 대지 않았다. 다니엘은 힘겹게 자기 몫을 끝내더니 어떤 절망이 서린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다 안먹느냐는 것이다. 나는 억지로 먹는 것도 어느 정도나 되어야 먹지 이건 물이랑 삼키는 게 아닌 이상 답이 없다고 말했다. 다니엘은 힘겹게 또 힘겹게... 영화 "마틸다"에 나왔던 초콜릿 케이크 투사 '브루스'가 케이크 체벌 후반에 한없이 늘어진 페이스로 케이크를 먹었듯이 내 오믈렛을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그와 수없이 싸워본 내가 장담하는데 다니엘은 남이 뭘 하란다고 하는 온순한 성미가 절대 아니다. 나와 다니엘, 양가 부모님 모두 식탁 교육에서 먹기 싫을 때는 남겨야 한다고 강조하셨고, 이 남자는 심지어 미식가다. 그리고 다니엘은 내 앞에서 이 오믈렛이 얼마나 맛없는지 수없이 강조했다. 그런데 대체 왜? 살면서 트런치불(영화 "마틸다" 속 막장 교장) 같은 선생이라도 만났던 건가? 프랑스 교육 시스템에서 그런 인물이 생존할 수 있을까? 아닐 텐데?

 정말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오고갔다. 다니엘은 결국 오믈렛을 끝장내지 못했고, 나는 식사가 어땠느냐고 묻는 웨이터의 웃는 얼굴이 기막혔다. 어차피 하루 오고 안 오는 뜨내기 손님들 상대로 배짱 장사하는 거 당신도 빤히 알텐데 음식이 어땠냐고요? 게다가 웨이터는 내가 음식을 남겼다는 사실을 지적하기까지 했다. 드셔봐, 한번 드셔 보시라고. 나는 한 숟가락을 크게 떠서 권하고 싶었다. 그리고 은은한 수치가 베어나는 다니엘의 얼굴을 본 나는 눈치를 챘다. 이거구나. -우리는 이날 몽생미셸의 숙소에서 묵었는데 저녁 산책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문제의 오믈렛집이 문을 닫고 산더미같은 현금을 세는 모습을 보았다. 무척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프랑스의 다양한 오만 중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은 이 부분이다. 내가 진상 짓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손님이 인간인 이상 호오와 취향은 존재한다. 특히 음식은 정말 섬세한 취향의 영역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가 음식에 들어가는 모든 수고와 재료의 값을 치른 이상 음식을 남겼다고 해서 책망받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도 프랑스의 수많은 식당들이 음식을 남긴 손님을 2초 이상 바라보거나 마음에 안들었느냐고 묻거나, 옆 테이블 사람들에게 내가 음식을 남겼다는 사실을 알리는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직, 간접적인 무안을 준다. 나는 신 음식을 못먹는데, 어느 날 레스토랑에서 제공하는 세트 메뉴에 레드커런트로 장식한 패션프루트 샤베트가 포함되어 있었다. 당연히 한입 먹은 후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둘 다 내 기준에는 너무 시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릇을 가지러온 웨이터는 또 다 드신 게 맞느냐고, 뭔가 문제가 있었냐고 물었다. 다니엘은 약간 수줍은 표정으로 내가 얼마나 신 음식을 못 먹는지 설명했다. 나는 돈을 낭비하는 것을 경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식당에서 제공하는 다른 메뉴가 있었다면 틀림없이 좀 더 많이 먹을 수 있는 디저트를 선택했을 것이다. 00년대 급식검사도 아니고 내돈 내고 내가 먹는다는데 입에 안 맞아서 남긴 걸로 대체 왜 이런 상황에 놓여야 하는지,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아무리 설명하기가 수줍어도 다니엘은 내게 강요하지 않았고, 그 후로는 음식을 남길만한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연애한지 5년이 넘도록 기억에 남는 사건은 없었다. 하지만 얼마 전 다니엘의 사촌인 베카가 독일에서 놀러왔을 때. 크레이프를 좋아하는 그녀를 위해 찾은 크레이프가게에서 나는 프랑스에 온 이래 가장 직접적인 무안을 당하게 된다. 크레이프는 크게 식사가 되는 짠맛과 디저트가 되는 단맛 크레이프로 나뉘는데, 나는 이날 얇게 썬 안두이(Andouille) 소세지(링크 참조)와 톰(Tomme) 치즈가 들어간 크레이프를 시켰다.


 그날따라 먹은 것도 없는데 왜 배가 불렀는지, 반이 좀 안 되는 양이 내 접시 위에 남아있었다. 다니엘은 디저트 크레이프도 먹을 거라 내 것도 먹을 생각은 없다고 했고, 우리는 그곳이 격식 차린 레스토랑이 아니어서 조금 방심했다. 아저씨가 미스터빈의 거푸집같은 표정을 하고 내 접시를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한 것이다-얼굴은 그렇게 닮지 않았지만 표정과 분위기가 많이 닮았다-. 좁은 가게 안에 다닥다닥 붙어 앉은 손님들은 1초만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눈치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구 웃기 시작했다. 나와 다니엘, 베카와 베카의 남자친구인 휴고까지 네 명 다 부끄럼쟁이만 앉은 우리 테이블은 아무도 말이 없었지만 다들 탈출하고 싶어하는것만은 확실하다. 아저씨는 접시를 빤히 보는 데에 그치지 않고 나와 접시를 번갈아 보면서 뭐가 문제냐는 메세지를 전달했다. 나는 이미 배가 꽤 불렀기 때문에, 또 아저씨가 '왜 남겼니 쇼'를 재연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디저트 크레이프는 주문하지 않으려 했지만 친절하게도 베카가 자기 것을 반씩 먹자고 해 주어 초코맛 크레이프를 반씩 먹었다.

 이날 일은 그나마 웃기기는 했고, 또 아저씨가 나쁜 맘을 먹고 한 짓도 아니어서 그렇게 나쁜 기억으로 남아있지는 않다. 식사가 끝날 무렵 다니엘이 베카에게 물었다.

"독일에서도 (베카는 아버지가 독일 분이라 독일에서 나고 자랐다) 음식 남기면 이렇게 눈치 줘?"

베카는 그렇지 않다고, 그냥 싸가면 되는 문제라서 이런 적은 없다고 했다. 나는 프랑스어를 공부하면서 읽은 지문 몇 개가 떠올랐다. 프랑스의 식량 낭비가 심각한 수준임에도 포장 문화는 발전하지 않고 있다고-관련 옥외광고도 여러 차례 보았다-. 실제로 나는 레스토랑에서 도기백(남은 음식 표장)을 부탁하는 사람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다니엘은 한숨을 쉬며 베카에게 자신이 레스토랑에서 도기백을 주문했다가 어떤 꼴을 당했는지 설명했다.

"내가 어지간하면 안 남기는데, 음식이 너무 많이 남아서 싸달라고 했더니 그냥 플라스틱 용기를 가져와서 나한테 포장하라 하더라. 애초에 포장하는 사람도 거의 없고."

 매우 프랑스적인 대응이었다. 부끄럼을 많이 타는 다니엘이 주변 테이블의 시선 속에서 음식을 용기에 담는 게 얼마나 고역이었을지 상상이 갔다. 남겼다고 눈치를 줄 거면 포장이라도 잘 해주던가, 포장을 안 해줄 거면 남겼다고 눈치를 주지 말던가. 프랑스의 다양한 오만 중에서 가장 내 심기를  건드리는 부분이다. 왜 멀쩡한 사람들을 눈칫밥 먹이는 것일까?


1년에 한두 번씩 휴가 영상을 편집해서 브이로그를 올리고 있는데요, 올해 여름 다녀온 이탈리아 실렌토 여행 브이로그를 업로드하였습니다! 링크를 클릭하시면 유튜브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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