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서 하기 싫었다
내가 정신과 의원에 대해 공포를 품고 있었다는 것은 이미 언급했다. 정신과에서 치료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면 주변 사람들이 어찌 생각할까, 싶은 마음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병원을 다녀서 나아진다 해도 또 나빠지지 않으라는 보장이 없는데, 삶이라는 게 계속 이렇게 좋아졌다, 나빠졌다가, 또 나빠졌을 때 주저앉아 고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도 무서웠고 언제 또 이런 생각을 할지 몰라 불안했다. 이 당시 나는 꽤나 진지하게 '디그니타스-스위스에 있는 존엄사 관련 비영리기관-에 물어보는 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다. 디그니타스라고 아무나 받아주는 것도 아니고 본인이 얼마만큼의 기간에 걸쳐 어떤 고통을 겪고 있고 무엇 때문에 죽음을 원하는지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야 하는 만큼 현실성은 없는 선택지였다. 게다가 스위스까지 가서 수속을 밟고 마지막 과정까지 진행하는 데 천만 원 넘는 비용이 들 것을 각오해야 했다. '천만 원'이라는 숫자는 재작년부터 한 해 동안 프랑스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꼭 통장 위에 일궈내고 싶은 수치였다. 내게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숫자였다. 천만 원이란 말이지.. 흠흠.
한국에 돌아와서 부모님한테 진 빚을 갚고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바지런히 여행을 다니느라 돈이 많이 줄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의 나는 뭔가가 즐겁다고 생각하면서도 '잘 됐어, 마지막이니까 즐거운 게 최고잖아.'라는 식으로 생각했다. 죽기 전에 응당 해둬야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의 사고방식이었다. 순간순간 '어, 아니라니까, 안 죽을 거라니까.'라는 식으로 저항은 했지만 어느새 구렁이 담 넘어가듯 다시 생각이 죽음 쪽으로 가 있었다. 어릴 때 저주받은 인형 괴담 같은 걸 종종 들어봤을 것이다. '죽음'에 관한 못된 생각은 바다에 던져도, 옆 도시까지 차를 달려 마주친 전봇대 밑에 버려도, 종국에는 갈가리 찢어버려도 온전한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저주의 인형 같았다. 나는 자신을 특별히 싫어하지도-극렬한 슬픔 외의 다른 감정은 거의 느끼지 못하는 상태였다.- 않으면서 자신을 부수고 싶어 했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때 영화를 한 편 봤다. <백만 엔 걸 스즈코>라는 영화였다. 한 곳에서 백만 엔(천만 원 정도)을 모으면 다른 곳으로 이사 가기로 마음먹고 생활하는 여자의 얘기였다. 난 롤모델을 만난 기분이었다. 난 아무한테도 못 볼 꼴 보이지 않고, 어떤 폐도 끼치지 않고 죽고 싶어. 아픈 것도 싫어. 그러려면 돈이 필요해. 그러니까 천만 원을 모을 때까지 일하고, 또 거하게 써버리고, 그리고 또 돈을 모으자. 그러면 또 살고 싶어 질지도 몰라. 아닐지도 모르지만. 치료를 시작하고 3주쯤 지났을까, 나는 쌍쌍바 갈라먹듯 가볍게 내 목숨에 관한 결정을 내렸다. 그래, 천만 원이 기준이다!라고.
아무튼, 얘기가 너무 빙 돌아왔다. 나는 병원에 가는 게 무서웠지만 동시에 병원에 관한 선입견이 꽤 심했다. 어차피 가봤자 내가 어떤 성장과정을 거쳐서 어떤 식으로 병을 얻게 되었는지를 얘기해보는 시간일 텐데. 이미 죽고 싶어 진 마당에 병이 어떻게 생겼는지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냥 우울해요, 그냥. 그냥 죽고 싶어요. 나는 왜 이 병이 생겼는지 알고 싶지 않으니까 약이나 주세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병원에 가고 싶지 않았다.
온화해 보이는 의사가 "가족 관계는?", "무슨 일을 하세요?", "요즘은 어디에서 지내나요?", "부모님과의 관계는 어때요?"라고 물었을 때 나는 '이래서 오기 싫었는데..'라고 생각했다. 치료를 시작한 첫날이었다. 이 도시에 이렇게 아픈 사람이 많았던가 싶을 만큼 병원이 붐볐다. 치료에 관한 기대치는 한없이 낮았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살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걱정 하나 없던 시절만큼 활기차지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쳐내도 쳐내도 돌아오는 '죽자'는 속삭임만 어떻게 멈출 수 있어도 정말 좋을 것 같았다. 그 외에는 내가 눈물을 제어하지 못해 사람들 앞에서 밥그릇 뺏긴 개처럼 울게 되는 일이 없기를 바랐고, 우울증이 낫지는 않더라도 예전 수준의 생산성과 생활에 대한 소소한 의지를 되찾고 싶었다. '좋다' 혹은 '싫다'처럼 감정이라는 걸 되찾게 되는 것도 내 바람 중 하나였다. 나는 아버지와 사이가 제법 안 좋은 편이라 아무래도 기존에 쌓인 울화가 있다 보니 내가 싫다는 의사를 분명히 해도 아버지가 뭔가를 밀어붙이면(안 먹는다고 했는데 먹으라고 20번 말하기, 빨리 나가야 하는 사람 붙들고 꼭 지금 하지 않아도 되는 일 갑자기 시키기, 포옹 등의 접촉 강요하기) 강렬한 분노를 느끼는 사람인데 귀국 이후 아버지한테 이전 수준에 미치는 분노를 느낀 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허망감이 굉장히 심했다. 과즙 하나 남기지 않고 쥐어짠 레몬처럼. 부모님을 볼 때마다 어떻게 저렇게 오래(라곤 해도 장년이시지만) 생존할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러다 보면 또 계속 이렇게 사느니...라는 생각으로 돌아갔고. 그만 그 고리를 끊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