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세 번째

온 앤 오프 앤 온

by 체리

치료를 시작한 지 시간이 많이 지났고, 다음 주부터는 약의 감량을 시도해보려 하는 만큼(나는 병원을 2주 간격으로 방문하고 있다) 상태가 많이 좋아진 것은 사실이다. 아주 옛날의 지나간 감정들을 되짚어 보면서 '나는 그때도 이미 우울했구나'라는 생각도 하고, 사소하게 스치는 감정들도 소중히 여긴다. 비록 그게 슬픔이나 아쉬움의 감정일지라도 일단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을 느낀다. 하지만 '아직 다 나은 건 아니군'이라고 느낄 때도 분명히 있다. 예를 들면 어제처럼.


다른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도 '대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를' 때가 있다. 메일함 용량이 꽉 찼다는 알림에 지워서는 안 되는 메일은 없는지 살펴보지도 않고 모든 메일을 영구 삭제해버린 어제처럼. 문제는 그 메일함에 향후 6개월을 대상으로 예약된 나의 항공권과 호텔 예약 정보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었고, 더 큰 문제는 그 항공권 중 하나를 항공사 홈페이지에서도, 그들의 애플리케이션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예약 번호를 어디 적어둔 것도 아니었고. 상담 데스크 운영 시간은 이미 끝났다. 단순히 휴지통에 버린 것이 아니라 그 휴지통에서마저 영구히 삭제해 버린 것이라 복구도 할 수 없었다.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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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날이 밝으면 바로 상담 데스크에 전화하자. 카드 내역도 있고, 내 개인정보도 있고.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적어도 며칠 몇 시 항공편인지는 알잖아'라고 생각했지만 마음 잡기가 쉽지 않았다. '망했어!' '다 망했어!' '70만 원이 날아갈 거야!!' 오...


마지막으로 운 게 언제였지, '울까', '울고 싶다' 고 생각했다. 그런데 불현듯 드는 생각이 있었다. '나 우울증이잖아.. 지금처럼 무섭고 놀라서 울만큼 감정이 풍부한 상태가 아니라고.' 한번 슬픈 생각을 해볼까 싶었지만 아무리 슬픈 영화를 봐도 가물은 눈에 작은 물방울 하나 고이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뻔했다. 게다가 집에 간 후에는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집에 가는 동안은 너무 신경을 써서 또 머리가 아프거나 속이 아프지 않도록-이는 결국 해야 할 일도 못하고 기분도 다잡지 못하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할 것이므로- 마음을 다스리는 정도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렇구나, 눈물이 안 나는구나. 울고 싶은데도 울 수 없다는 점을 떠올리니 아직 내가 완벽히 치료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 참고로 문제는 잘 해결되었다. 다른 항공편이나 호텔 예약도 모두 다시 전송해달라고 부탁했다.


*혹시나 싶어 말하는 것이지만 치료받기 전에는 사람들 앞에서 울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내 경우에는 그것이 치료를 받으면서 차차 안정되었고, 지금은 너무 안정되다 못해 울고는 싶은데 뇌와 울음을 관장하는 어딘가가 바짝 말라 나올 것이 없는 상태가 된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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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을 겪으면서 내 감정을 바꾸는 스위치는 너무 쉽게 움직였다. 꺼졌다가 켜졌다가. 게다가 대부분의 경우 내 의지로 원하는 상태로 되돌릴 수 없었다. 그것은 스위치라기보다는 차라리 선풍기 앞의 종이띠였다. 치료를 지속하면서 '너무 쉽게' 움직이는 부분은 반으로 줄었고, 다시 1/4로 줄다가 지금은 꽤 많이 작아졌다. 그러니까, 나의 1/12이 예상치 못한 메일함 포맷 사태에 고함을 치고 발을 구르고 머리털을 쥐어뜯어도 11/12는 평범한 수준의 불안만 느끼기 때문에 다수결과, (어쨌거나) 나의 의지에 따라 평정을 유지하고 이 사태에 대응할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그 작은 부분이 온 앤 오프 앤 온 앤 오프 앤 온! 하더라도, 전체가 흔들리는 일은 없으니까. 문득 우울증이 다 낫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더라도 '낫겠지 뭐'라고 생각할 수 있다. 꽤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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