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적이야
바짝 마른 수건 같던 우울증이 조금 나아지면서 감정이 돌아왔고, 이것을 우울증 발병 이전 수준으로 제어할 수 있게 되었지만, 되찾은 지 얼마 안 된 감정은 손오공의 여의봉처럼 들쭉날쭉했다. 제아무리 감정이 들쭉날쭉해도 감정이 돌아왔다는 사실에 느끼는 기쁨을 이길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내가 감정이 들쭉날쭉했다고 썼지만 이것은 감정이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수준의 폭으로 날뛰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나는 감정에 끌려다니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오랜만에 되찾은 감정의 진폭에 적응하는 과정이 마냥 쉽지는 않았다. 예전 생활의 궤도로 돌아가는 동안 나는 오늘 목표한 일을 해냈다는 사실에 세상의 왕이 된 것처럼(배경음악: 라이온 킹) 위풍당당한 기분에 젖기도 했고, 몸이 아파서 해야 할 일을 미처 끝내지 못한 날에는 스트레스 때문에 위가 불쾌하게 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5분, 10분 차이로 이런 감정들의 사이를 오가지는 않았지만 하루 간격으로 이런 감정들을 느끼는 것이 조금 피곤했다. 최대 시속 80km까지만 밟을 수 있는 차를 몰던 사람이 갑자기 제로백에 1초밖에 안 걸리는 힘 좋은 스포츠카의 운전대를 잡은 기분이었다고 할까.
그래도 우울증이 심했던 시기와 비교했을 때 느끼는 가장 큰 차이는 감정을 흩어 놓는 자극에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내 시스템에서 눈물을 내는 기능이 잠시 고장 났다는 것도 차이라면 차이일 터이다. 아, 하지만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전혀 안 하게 된 것은 아니다. 정말 상황이 나쁠 때는 한 번씩 하는데, 이거야 뭐 우울증이 생기기 전에도 어쩌다 한 번은 자조 섞인 '그냥 죽고 말지~'를 뱉곤 했으니 경계해야 할 수준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안 하면 더 좋기야 하겠지만 그거야 '담배는 끊는 게 더 좋고', '욕은 가급적이면 안 하는 게 좋지' 정도 되는 수준의 문제다. 요점은 요즘 하는 '죽음' 생각에 구체성도, 계획성도, 굳은 의지도 들어가 있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그 생각은 반복되지 않는다. 5분 전에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면 그저 그것뿐이다. 1시간이 아니라 10시간이 지나도 메아리가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이 치료를 시작하기 전과 비교했을 때 느끼는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다.
'해를 기다리는 아이'를 연재하면서 이런 생각은 표현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중증 우울증 환자들을 직, 간접적으로 접하면서 이 글을 쓰는 사람이 나여도 괜찮은 걸까?라는 생각을 한 번씩 했다. 쓰고 싶었고, 나누고 싶었기 때문에 중단이라는 선택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글을 쓰기 시작할 때 '이 병은 나을 거다'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 치료가 차도를 보이기 시작하니 조금은 혼란스러웠다. 나는 '우울증을 느끼는 내가 어떤 상태인지 나누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 시리즈를 시작했지만 이 시리즈가 몇 회차를 마지막으로 끝맺게 될지, 내가 얼마나 오래 쓰고 싶은지-사실 그때까지 살아있을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에 대한 고찰은 전혀 없었다. 일단 천천히 쓰면서 생각하다 보니 내 치료 자체도 아직 끝나지 않았고, 약을 끊기 위해 감량을 시도하면서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그리고 만약 내가 약을 끊게 된다면, 끊은 후에는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나눠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울증이 나아서 더 이상 그로 인해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는 건 굳이 깊이 생각하지 않더라도 좋은 일이지만, 한번 앓고 나니 솔직히, 이번이 인생의 마지막 우울증일 거라는 생각은 안 든다. 우울증은 또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지만, 나는 이 병에 나쁜 친구나 불편한 상사 같은 인격을 부여하지 않으려 한다. 내가 철마다 찾아오는 알레르기에 감기 대하듯 기계적으로. 필요한 조치를 취하면 그만이라는 태도로 임할 거다.
우울증, 너는 이제 국물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