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하고 아름다운 평화의 길 올레
# 15.6 km
# 광치기 해변 ~ 온평포구
# 상징 : 노랑부리저어새
# 21년 6월 21일 11시 10분 ~ 19시 (7시간 50분)
나의 올레길 바이블인 「 제주올레 가이드북 」에 따르면 소요시간은 4~5시간이며 난이도는 중에 속한다.
https://www.jejuolle.org/trail/kor/olle_trail/default.asp?search_idx=3
월요일 이른 아침 6시에 공항에 들렀다가 우진해장국을 먹고 성산일출봉으로 갔다. 우도 갈 때 다짐했던 성산일출봉 오픈런을 위하여. 멋진 풍경을 한적하게 즐기고 싶은 욕심에서 비롯된 오픈런이다. 성산일출봉을 보는데 오전 8시에 시작하여 11시에 끝났으니 3시간을 성산일출봉에 쏟아부었다.
https://brunch.co.kr/@yeohae/92
2코스는 갈고리 모양으로 되어 있다. 광치기 해변에서 시작해서 내수면 둑방길 ~ 식산봉을 올랐다가 오조리에서 고성리로 들어오는 길이 시작이다. 이렇게 광치기 해변에서 시작해서 광치기 해변 앞에 다시 오면 5.4km이고 곧 중간 스탬프 지점이 나온다. 2코스는 두 개의 오름을 지나는데 갈고리 쪽에 있는 식산봉과 대수산봉이 그것이다. 이후 밭길이 이어지다가 온평리의 혼인지를 보고, 온평포구에서 끝이 난다.
'광치기' 이름이 웃기다. 광을 친다는 건가. 하지만 제주어를 육지어로 해석하면 안 된다. 광치기는 원래는 관치기였다. 제주에서 어업을 위해 테우를 타고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면 테우는 부서지고 어부들은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이때 파도에 의해 시체가 이곳까지 떠밀려오면 관을 짜 시신을 수습하였다고 하여 관치기라는 말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재미있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또 이런 비극적인 이야기가 들어있다니. 제주답다. 하지만 썰물 때 드넓은 암반지대가 펼쳐지고, 그 모습이 마치 광야와 같다 항 광치기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유래도 있다. 나는 전자의 유래가 더 마음에 든다.
성산일출봉의 한쪽 편은 파도에 침식되어 깎아지른 절벽과 그리고 육지와 연결된 반대편은 보존되어 있는 모습이 대비되어 잘 보인다. 절벽 쪽도 이렇게 완만한 경사의 지형이었을 것이다. 오랜 세월, 아주 오랜 세월 파도와 바람에 깎여서 산이 바위가 되고, 바위가 돌이 되고, 돌이 모래가 되어 바다 밑에 그리고 해변에 쌓였다. 광치기 해변 어딘가에도 성산일출봉이 고향인 모래들이 있다.
광치기 해변은 이끼 낀 너럭바위가 있다. 모래는 짙은 색과 하얀 모래가 섞여 있어 독특한 풍경을 가지고 있는 해변이다. 누러면서 고동색이면서 애매한 색깔 때문에 엄청 '예쁘다!'의 느낌은 아니다. 독특하다 정도의 느낌이다.
성산일출봉을 뒤로하고 출발하지만,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기 때문에 계속 성산일출봉이 보인다. 2코스는 내내 성산일출봉이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내수면이 뭐지? 내수면이란 “하천, 댐, 호수, 늪, 저수지와 그 밖에 인공적으로 조성된 민물이나 기수( 汽水: 바닷물과 민물이 섞인 물) 수면을 말한다. 조선 말기에 논을 만들기 위해 둑을 쌓았는데, 습지가 되어 버렸다. 그만큼 제주에게 '논'이란 상성이 맞지 않는 것이다. 또, 새마을사업으로 8만 여평에 달하는 양어장을 만들었는데, 현재는 운영되고 있지 않다. 사람의 돈벌이에는 맞지 않는 땅이었지만 새들에겐 천국이다. 이곳은 겨울철새들이 중국, 러시아로 올라가는 길목에 쉬다 가는 곳이다. 겨울철이면 황새, 고니, 물수리, 저어새, 노랑부리저어새, 흑기러기, 원앙, 가마우지류, 백로류, 물닭류, 섭금류, 갈매기류 등이 찾아와 겨울을 보낸다고 한다.
호수 같기도 하고, 저수지 같기도 하지만 바다이다. 걷다 보면 시멘트 포장길에서 나무판자 길로 바뀐다. 그러다가 그냥 흙길이 된다.
멀리엔 성산일출봉이 계속 보이고, 가까이엔 푸르른 나무들, 그 옆에는 제주의 까만 돌들이 자기만의 개성을 뽐내고 있다. 그리고 있는 제주의 또 다른 푸른 물이다. 바당올레는 물론 바닷물이기에 바당올레인데, 일반적인(?) 해안 올레와는 확연히 다른 풍경이다.
성산일출봉의 모습을 가리는 못생긴 건물이 보인다. 내가 볼 땐 이 풍경의 옥의 티로 아주 못생긴 티라고 생각하는데, 이 풍경에서 저 건물이 있음으로써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사람들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생각도 모두 다르다. 너무나 당연한 듯한 생각에도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너무나 거슬리지만, 애써 위안 삼아 본다. 누군가에겐 예쁠 수 있다.
여기는 현무암 모양이 수직으로 깎여있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왜 그럴까?
올레길을 걸으며 용암 지형을 유심히 보려고 노력하다 보니 이제 파호이호이 용암과 아아 용암이 구별되는 것 같아서 뿌듯하다. 파호이호이 용암의 특징인 밧줄 구조가 잘 나타나는 곳이 있었다. 앞에 있는 용암이 먼저 굳는데 그 뒤에서 계속 흐르는 용암이 밀려오고, 또 걔가 굳고 하면서 만들어지는 구조이다.
해안가를 지날 때는 이제 용암 수로도 알아보는 모양인데, 내가 보는 게 맞는지 확인해줄 사람이 없다.
바다와 바다 사이를 건너는 내수면 둑방길을 걷다 보면 아주 자그마한 오조포구가 나온다.
내수면 둑방길을 걸으면서 보이던 야트막한 오름이 바로 식산봉이다. 저 멀리 1코스 때 건너는 성산갑문도 보인다.
식산봉을 오르다 보면 나무 사이로 우도가 보인다. 저곳에서도 여기가 보였겠구나. 우도봉 언덕을 오른 이가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아름다운 제주 풍경에 누군가 취하고 있겠구나 싶다. 식산봉 정상에 오르면 우도와 성산일출봉, 그리고 걸어왔던 내수면의 아름다운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다.
식산봉을 내려오면 또 짠! 성산일출봉이 나타난다.
이곳은 '쌍월' 즉, 두 쌍의 달을 볼 수 있는 월출 지점으로 유명하다는 지질트레일 표지판이 있다. 일출봉에서 떠오른 보름달이 내수면에 비치며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제주는 날씨와 날짜를 맞춰 아름다움을 봐야 할 곳들이 너무나 많구나. 이 풍경 또한 보러 오고 싶다. 느낌 있는 나무다리를 지나 오조리 마을로 들어간다. 다리에서 돌아보면 식산봉과 성산일출봉이 보인다.
오조마을 족지물을 만나면 이제 바다와 바다 사이를 누비는 2코스의 길은 끝나고, 이후부터는 주욱 육지의 길이다. 족지물이 3km 지점이었고, 족지물 앞 정자에서 잠시 쉬었다. 오조리는 제주에서 네 번째로 용천수가 풍부한 마을이다. 이곳 족지물 외에도 11개의 물통이 더 있었다고 한다.
다른 올레길에선 많이 보지 못했던 할망민박이 많이 보였다. 오조리에는 이런 오래된 창고 건물들이 많아서 신나서 걷고 있는데, 이런 건물이 식당이길래 냉큼 들어갔다. 아침도 해장국을 한 그릇 먹고, 카페에서 스콘도 먹어서 배가 그렇게 고프지 않은 상태였는데 그냥 오래된 건물에 취해 들어갔다. 국숫집이었는데, 여기서 내 생애 가장 맛있는 국수를 먹었다. 파스타는 좋아해도 국수는 거의 땡겨본 적이 없는 음식인데. 정말 너무 맛있었다. 올레길 걷다가 정말로 배고픈 상태로 먹으면 천상의 맛일 듯하다.
마을길을 지나 흙밭길을 걷다 보면 다시 바다가 살짝 나온다. 여전히 성산일출봉이 보였다. 그리고 여러 종류의 새들이 물에 발 담그고 있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5km 지점인 성산 하수종말 처리장을 지나고, 2시 반 즈음 햇볕이 너무 강렬해 쉬어가기로 결정했다. 다리 아파서가 아니라 햇빛 때문에 쉬기는 처음인 듯하다. 한 시간 정도 쉬고 나왔더니 3시 50분인데, 이때부터 하늘이 예술이었다. 카페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수증기 때문에 흐릿한 느낌이 있으며 하늘은 하늘색이었는데, 이제는 새파란 하늘이 되었다. 하늘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제주도립미술관에서 본 강운 작가의 <공기와 꿈> 작품이 떠올랐다.
하늘이 너무 예뻐서, 자꾸자꾸 서서 하늘을 쳐다보게 된다. 하늘이나 구름에 그다지 감탄하는 스타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올레길에선, 아니 제주에선 saliency가 하늘에 잡히는 경우가 많다. 서울에서 이런 하늘을 본 적이 있던가? 지난 1년 동안 하늘을 본 적이 있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지난 1년을 떠올리면 엘리베이터 앞, 새하얗고 거대한 병원 건물을 밖에서 보던 것, 그리고 들어가기 싫었던 후문의 회전문이 그려진다.
오전 8시부터 걸었기 때문에 과연 2코스를 완주할 수 있을까? 힘들면 중간에 그만 해야지 라는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지칠 때 즈음 이런 하늘이 나타나서 이 하늘을 계속 보기 위해서 계속 걸었다. 내가 향하고 있는 대수산봉과 하늘의 어우러짐이 거의 천상 뷰이다. 제주는 천국인가!
이 멋진 하늘을 한 컷에 담아보고 싶어서 파노라마를 찍어보았는데, 하늘은 파노라마가 잘 안 되는 모양이다. 옆으로 기다란 수평구조 파노라마가 제주의 풍경을 담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진가 김영갑 님의 뜻이 생각나는 순간이다. 또, 제주에 가끔 사진 찍으러 와서 날씨가 따라주지 않아 비행기 값만 날렸다는 사진가들에 대한 이야기도 생각난다. 공기가 흐르는 제주의 공간은 쉴 새 없이 바뀐다. 내가 보는 구름들도 걸으면서 계속 다른 모습을 보여주니 말이다. 찰나의 순간은 차분히 자연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에게만 허락된다. 오늘 나에게 허락된 제주의 하늘에 자연스럽게 겸허해진다. 제주는 장마가 올 때라는데, 이 파란 하늘은 한동안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뒤돌아보니 여전히 성산일출봉이 눈에 잡혔다.
흐르는 물을 사이에 둔 고성리의 두 개의 오름 중 큰 오름인 ‘큰물뫼’이다. 대수산봉이라는 이름보다 ‘큰물뫼’가 훨씬 아름답다. 들어가는 길에 간세에 써진 설명이 ‘아름다운 제주 동부가 한눈에 들어온다. 섭지코지가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곳이다.’라는 설명이 기대에 들뜨게 만들었다. 표고 137.3m의 오름, 가뿐하게 오른다. 정의현 수산진에 소속된 수산봉수가 있었던 곳이지만, 아무 흔적도 없다. 저 의자에서 보는 풍경이 어떨까?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의자의 뒷모습이다.
여기서 한참을 머물렀다. 발이 떼어지지 않는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뒤를 돌면 대왕 빌런 한라산과 그가 거느린 신하 같은 제주 동부의 오름들! 새파란 하늘, 그리고 비늘구름과 양떼구름!
앞으로 보면 지미봉, 식산봉, 우도, 성산일출봉, 섭지코지가 펼쳐진다.
엄청난 풍경을 남겨두고 내려가기가 아쉽다. 하지만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다니 정말 행복했다. 이미 시간이 5시가 다 되어가고, 겨우 반 왔기 때문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내려왔다.
밭길이 이어진다. 아침부터 성산일출봉 탐험에 이은 올레길이라 몸이 지쳐있음이 느껴졌지만, 아름다운 하늘을 감상하며 걷는다.
밭길을 나와 혼인지를 향한다. 삼성혈에서 알게 된 혼인지가 과연 어떤 모습일지 호기심을 가지며 걷는다. 아름다운 제주 여름 수국이 잔뜩 피어있다.
혼인지는 성산읍 온평리에 있는 연못이다. 삼성혈, 삼사석과 함께 탐라 개국신화의 현장으로 혼인지와 신방굴이 함께 있다. 이 연못은 ‘흰죽’, ‘흰죽물’로 불리고, 가물어도 물이 상시 있어 상수도 보급되기 전까지 식수와 농업용수로 사용되던 못이다.
제주의 역사는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라는 세 명의 을나(乙那, 신인神人이라는 뜻)가 나오면서 시작한다. 제주의 시조가 되는 이 세을나(삼신인三神人)는 땅에서 솟아난다. 이들은 수렵, 채집 생활을 했고 사냥을 하다가 바닷가 (현재 온평리 황노알)를 지나는데 벽랑국에서 신인을 찾아온 세 명의 공주를 만난다. 이때 이 공주들이 말과 소, 곡식의 씨앗을 가져와 제주에 농업이 시작된다. 이들이 결혼을 하기 전 혼인지에서 목욕을 하고 혼인을 했다. 이후 신방을 차린 굴이라고 해서 신방굴이 혼인지 옆에 있다. 세 개의 방이 있다. 이 동굴에서 적갈색 경질토기편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탐라시대 전기(0~300) 때 만들어진 유물인데, 이 시기는 대규모의 마을이 형성되는 시점이라고 한다. 이제 막 형성될 때라 그런지 이 유적은 일반적으로 쓰는 주거용이었다기보다는 임시 거처나 제사를 위한 공간으로 추정된다는 설명이 쓰여 있다.
벽랑국 세 공주가 도착한 온평리 해안 황노알에는 ‘연혼포’라고 쓰인 바위가 있다. 세 공주가 제주에 농업을 퍼트려준 ‘삼신’과 다름없으니 이곳을 좀 더 기려야 하지 않을까. 원시 수렵 채취 생활밖에 할 줄 모르던 세을나에게 고급 기술을 가져온 사람들인데 말이다. 세 을나가 이들을 보고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하여 ‘쾌성개’ 또는 ‘환성개’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12.6km 지점인 혼인지를 지나면 온평포구까지는 마을길이다. 서쪽으로 해가 기울어진 것을 느낄 수 있다.
온평 환해장성이 나온다. 원래 모습과 새로 복원한 것이 이어져 보인다.
해녀의 집에서 성게 비빔밥을 저녁으로 먹었다. 새파란 하늘에서 노란빛이 끼는 해질녘의 하늘에 또 반했다. 바다에 반사된 하늘과 구름이 너무나 예쁘다. '너무 예쁘다'는 표현 말고 다른 말은 없을까?!
도착하기 직전에 저녁까지 먹고, 부른 배를 두드리며 19시 드디어 온평포구에 도착하여 2코스를 마무리하였다. 버스 타러 일주로를 향해 올라가며 온평리 마을을 구경했다.
버스 타고 광치기 해변으로 돌아왔더니 서쪽으로 지는 해가 절경을 이루어 또 한 번 감동을 주는 제주 자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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