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에서 '조금 느리게 살기'는 사치일까
너무 바빠서, 너무 시간이 간절하게 필요해서 차로 50km/h 과속 장비에 몇 번씩 걸리면서 다녔다. 아니, "다녔다"는 말은 당시의 이동을 표현하기에 광범위하다. '다닌다'라는 말에는 다양한 곳을 간 것 같은 뉘앙스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녔다기보다는 "왔다 갔다 했다". 집과 학교만을 말이다. 4년 동안 집과 학교를 걸어서 간 적이 한 번일까, 두 번일까. 이동하는 시간 조차 줄였어야 하는 생활에서 춘천은 집과 학교길로 축소되어 나에게 남아 있다. 이름 난 관광지도 가보지 못하고, 곳곳에 있는 골목길도 모두 놓쳤다. 걸으면서 알 수 있는 느림의 아름다움을 두고 느끼질 못했다.
제주도도 마찬가지였다. 18살 수학여행을 최초로 시작으로 세, 네 번 정도 왔을까. 차로 돌아다니던 제주도는 그냥 ‘평범한’ 바닷 동네였다. 돌이 좀 까맣고, 차도가 좁은 그 정도의 여행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내가 춘천에서 차로 휙휙 지나가며 못 봤던 것이 제주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걷는 여행을 시작하자마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올레길을 걸음으로써 내가 그동안 놓쳤을 아름다움들이 아깝게 느껴졌다. 느리게 살기, 느리게 걷기, 조금 느리게 등등 사회가 너무 급박하게 돌아가서 tone down 하자는 뻔하고 단순한 구호인 줄 알았건만 아니었다. 조금만 느리게 하여도 마음이 풍요로워질 수 있음을 깨달은 사람들은 미리 알고 얘기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한 번이라도 해봤다면 알았을 텐데. 지금이라도 땅에 두 발을 딛고 걸어봄으로써 깨달아서 다행이다.
「놀멍 쉬멍 걸으멍 제주올레여행」 책에서도 빠름과 느림에 관한 고찰이 나온다.
'속도는 과연 행복한 질주일까'라는 의문을 던지는 책 < 템포 바이러스>의 저자 페터 보르샤이트는 인류가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휘둘리게 된 원인으로 '경제력'을 들고 있다. "남보다 더 빨리 하겠다는 욕심 때문에 속도는 그 자체로 하나의 가치가 됐고, 목적이 돼버렸다. 속도의 특권계층에 속하고 싶은 욕망은 일상생활에서 더 빠른 자동차, 더 빠른 컴퓨터를 사기 위해 돈을 벌도록 끊임없이 강요한다." 가속화 중독의 여러 징후를 세밀하게 탐색한 끝에 저자는 이런 결론을 내린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는 데는 시계가 필요 없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 주는 혜택을 이용하는 것이다."
학교 생활은 조급함을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그 조급함에 내가 반응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학교가 생산한 빠른 속도를 내 스스로 조금 늦추거나 멈추거나 할 수 있었으나 나는 속도를 더 높이는 선택을 했다. 학교에서 기원된 조급함은 나에게 들어왔을 때 2배 아니 3배의 조급함으로 변했다. 그렇기 때문에 도심에서 차를 마구 달리고, 가까운 거리도 차를 타지 않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올레길을 걸으면서 내가 학교를 다니면서 만약 조금이라도 '걸었다면' 그런 서두름을 한 두 발짝 멀찌기 바라보고 나의 급함을 성찰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나의 속도가 아닌 사회의 속도에 발맞추기 위해 미친 듯이 달렸다. 사회도 나에게 채찍질하고, 학교도 나에게 채찍질했지만 무엇보다 내가 나에게 채찍질을 수도 없이 했다. 낙오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1등으로 결승점에 들어가기 위해서. 채찍을 통해 단련되어 굳은살이 배겼지만 결국엔 견디지 못하고 상처가 덧난 것 같다. 가끔은 멈춰 서서 냇가에서 물도 좀 마시고, 멍 때리면서 먼 산도 좀 바라보고 하며 흘린 피를 멎게 할 시간이 필요했는데 말이다. 올레길을 만든 서명숙 님은 그런 속도에 지친 사람들에게 휴식과 위안을 주는 올레길을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이런 '느리게 걷기'를 몸소 알게 해 준 것만으로도 그분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되었다.
백수가 되고 시간에 쫓기는 일이 없어졌다. 병원에서는 1초도 늦으면 안 되는 순간들이 너무나 많았기에 시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백수가 되니까 시계를 안 보게 되고, 그냥 눈이 떠지면 일어나도 졸리면 잠에 청했다. 무엇보다 목표가 되는 시간에 맞추지 않아도 되는 여유가 좋았다. 그런데 카카오 맵에서 우리 집에서 어딘가를 가기 위해 검색을 하고 나면 내가 탈 버스가 몇 분 뒤에 도착하는지 바로 보였다. 아주 편리한 기능이다. 그런데 백수인 나에겐 그 정보는 알고 싶지 않은 정보였다. 우리 집에서 버스 정류장까지는 5분이 걸리고, 배차 간격은 대략 15~20분 정도이다. 그래서 '3분 후 도착'이라는 말이 눈에 들어오면, 고민이 생긴다. 뛸까? 조금 빠르게 걸을까? 이거 놓치면 좀 억울한데. 급할 것도 없는데 그냥 다음 꺼 탈까? 그럼 한 30분 정도 늦는데, 그래도 되긴 되는데 그럼 좀 더 여유 있게 준비할걸. 이런 생각들이 순식간에 지나가며 평화롭게 사는 나에게 분란 거리를 준다. 몇 분 후 도착인지 몰랐으면 나의 속도로 걷고, 그렇게 도착해서 버스를 기다릴 텐데. 첫 번째를 놓치고 두 번째가 아니라 그냥 첫 번째 버스가 돼서 아주 평화롭고 행복할 텐데.
도리어 한 템포 늦추는 "느리게"가 여유를 가져다준 다는 것은 모순일까, 당연한 걸까. 빠싹 시간을 땡겨쓰고, 시간이 생기면 그게 여유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스마트폰이 일을 편리하게 해 줘서 더 쉴 수 있게 해 줄 것만 같았지만 도리에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연락에 업무가 더 늘어난 것처럼 말이다. 1초, 1초에 쫓기는 병원의 순간들은 떠올리기만 해도 스트레스가 몰려온다. 정말로 사람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는 그다지 스트레스 상황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이들의 신경이 그 환자에게 쏠려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할 일이 많아서' 밀도 높은 업무 시간 때문에 쫓기는 사람들이 가득한 그곳이다. 아마 스트레스를 보는 귀안을 가졌다면 온통 새까맣게 보였을 것이다. 왜 이렇게 늦게 왔냐는 펠로우의 고함소리, 간호사의 짜증, 오픈콜을 울려버리겠다는 레지던트의 협박. 0.1초도 낭비하면 안 되는 CPR 상황이 아니라 그냥 모두 일이 많고 힘들어서 나오는 날 선 말과 행동들. '조금 느리게, 조금 천천히' 슬로건을 내걸면 미소와 친절의 여유가 생길 텐데, 우리나라 의료 문화와 제도 하에선 불가능할 것이다.
조금 느리게 가면 동료의 우울한 얼굴도 보이고, 타 직종의 울상도 보인다. '빨리빨리' 살 때는 교수나 상사의 눈치만 보고 아랫사람이나 주위 사람들의 시그널은 무시하게 된다. 왜냐하면, 급하니까. 그리고 그들보다 상사가 더 중요하니까. 병원에서 그렇게 무시되는 것 중에 하나가 환자의 시그널이다. 공장식 대형병원에서 환자나 보호자의 투정은 아무리 '환자중심병원'이라는 타이틀을 내건다고 해도 세세하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 왜냐하면, 급하니까. 하지만 그 조급함은 "실제"가 아니라 "허상"이다. 문화가 만들어낸 급함이다. 우리 모두의 마음에서 만들어낸 가상 세계이다.
사람이 아무리 느리게 걸어 다니면서 본다 해도, 세상에는 늘 사람이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빨리 간다고 해서 더 잘 보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귀중한 것은 생각하고 보는 것이지 속도가 아니다. 사람의 기쁨은 결코 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 알랭 드 보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