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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여해 Jun 18. 2021

배우고 느낄 거리가 가득한, 올레 18코스 (1/2)

고요하고 아름다운 평화의 길 올레

# 19.8 km

# 제주 원도심 ~ 조천만세동산

# 상징 : 곤을동 4.3마을

# 제주 원도심 ~ 삼양 해수욕장 중간 스탬프 지점 : 2021년 5월 28일 12시 45분 ~ 17시 35분 (4시간 50분) 

# 삼양 해수욕장 중간 스탬프 지점 ~ 종점 : 2021년 5월 30일 7시 40분 ~ 12시 35분 (4시간 55분) 


나의 올레길 바이블인 「 제주올레 가이드북 」에 따르면 소요시간은 6~7시간이며 난이도는 중에 속한다. 


19살 때부터 쭉 함께한 샘소나이트


9시 반에 일어나 10시에 나왔다. 이런저런 할 일도 있어 여유롭게 출발한다. 오래전에 산 샘소나이트 가방이 자꾸 고장을 일으킨다. 그래도 정이 들어 새로운 걸 살 생각은 안 든다. 오래된 모델이라 혹시나 바퀴가 없을 수도 있다고 한다. 그래도 웃으며 싫은 소리 안 듣고 에이에스 맡길 수 있는 게 어디냐 싶다. 가게들은 팔 때는 에이에스가 잘 된다고 팔지만 막상 구매가 아니라 에이에스를 하러 가면 아주 똥 씹은 표정이기 십상이다. 


샘소나이트 후에는 아라리오 미술관에 갔다. 원래는 뮤지엄 데이로 올레길을 걸을 예정이 없었기 때문에 예매했던 것이었다. 미리 예매하지 않았어도 무방할 정도로 관람객은 많지 않다. 그리고 배고파서 근처에서 국수로 요기를 하였다. 주차는 아라리오 뮤지엄 바로 맞은편 무료 공영주차장에다 해놓고, 관덕정 분식까지 걷는다. 지하상가 조성으로 지상에 횡단보도가 없어서 지하에서 조금 돌았다. 관덕정 분식 발견! 이미 너무 많은 다릿심을 소비했나. 관덕정 분식은 17코스를 끝낼 때 먹어보기로 생각하고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선크림을 범벅한다. 그리고 오늘도 늦은 출발을 한다. 12시 45분이다. 시작하기엔 늦은 시간이라 등산화 객은 나뿐이다. 



쓸쓸하고도 쓸쓸한 광해군 유배지 표석


18코스는 제주의 옛 도심에서 출발한다. 출발하자마자 광해군 유배지 표석이 나온다. 국민은행 제주지점 건물에 천대받는 객처럼 무상하게 있다. 씁쓸하다. 나의 최애 광해군의 유배지는 찾을 길이 없다. 표식에는 1637년(인조 15년) 제주에 들어와 유배지가 서문 안에 있었다는 설이 있다고 적혀있다. 즉, 이 곳이 아닐 수 있다는 뜻이다. 광해군이 4년 넘게 머물렀던 곳은 이 넓은 제주 어디 즈음 일까.



귤림서원 


귤림서원이 나온다. 서원 이름에도 '귤 귤橘' 자가 들어가다니 제주의 서원은 이름 조차 귀엽다! 귤림서원은 1578년(선조 11년)에 세워졌다. 제주에서의 관직은 제주목사가 정3품으로 가장 높고, 오늘날로 치면 제주도지사이다. 그 밑에 제주부도지사가 바로 제주판관으로 종5품에 해당했다. 그 밑에 제주시장, 서귀포시장 격으로 볼 수 있는 대정현감, 정의현감이 종6품이다. 귤림서원은 제주판관 조인후가 기묘사화로 제주에 유배되었던 김정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사묘를 세운 데서 시작하였다. 1667년(헌종 8년) 제주판관 최진남이 김정의 사묘를 장수당 남쪽인 현재의 오현단 안에 옮겨 짓고, 귤림서원이라고 판에 글을 새겨 내건다. 귤림서원은 1871년(고종 8년) 흥선대원군의 서슬 퍼런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된다.





장수당


귤림서원 옆에 장수당이 있다. 장수당은 강당으로 총 10칸이다. 세종 때 한성판윤(현 서울시장)을 지낸 영곡 고득종의 옛터에 세운 것이다. 1660년(헌종 1년) 제주목사 이괴가 진사 김진용의 건의로 건립한다. 1875년 (고종 12년) 제주목사 이희충이 장수당 옛 터에 경신재를 세워 귤림서원이 철폐되었음에도 선비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오현단


오현단은 1682년(숙종 8년) 제주목사 신경윤이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현, 동계 정은의 4현을 봉향하다 1696년(숙종 22년) 이익태 절제사 때 우암 송시열이 합쳐져 총 5현을 배향하게 된다. 1871년 서원 철폐령으로 귤림서원의 철거 후에 그 자리에 제단을 조성한 것이 시작이다. 지금은 위패를 상징하는 조두석 5기가 설치되어 있다. 이 오현인에 대해선 따로 공부해서 글로 남길 예정이다. 18코스는 역사의 흔적이 가득한 제주 원래 도심을 지나기 때문에 공부할 거리가 가득하다. 




향현사


오현단 옆으로 향현사가 있다. 1843년(헌종 9년) 제주목사 이원조가 영곡 고득종을 봉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산지천을 만나다


조선 사대부들이 성리학에 심취한 곳을 벗어나면 오현단 옛 모습 안내판이 주르륵 나온다. 1950년대 이 곳의 모습 사진들이 있어 흥미롭게 보았다. 마을길을 따라 올라가면 산지천과 시장이 내려다 보이는데, 이곳에도 표지석이 하나 있다. 1555년(명종 10년) 왜적 1천여 명이 화북포로 상륙하여 제주성을 포위하였고, 3일간의 공방전이 벌어졌던 을묘왜변의 현장이라고 한다. 


남수각 하늘길 벽화거리를 지나 제주 동문 공설시장으로 들어선다. 귀여운 제주를 기념할 소품들을 많이 판다. 가방이 무거워지지 않도록 눈을 돌리지 않고 올레 표시만 보고 빠르게 지나쳤다. 나중에 가볍고 빈 가방을 들고 재방문해봐야겠다. 


동문로터리로 나왔다. 아라리오 뮤지엄 동문 모텔이 나온다. 코로나 때문에 6월까지 문을 닫는다는데, 6월 이후에 다시 가볼 수 있으면 좋겠다. 산지천을 따라 걷는데, 가느다란 물줄기가 벽에서 튀어나왔다. 웅장하거나 멋들어지진 않지만 소소한 분수쇼가 아기자기한 제주와 어울린다. 


산지천은 한라산 북쪽 해발 720m 지점에서 시작되어 아라동, 이도동, 일도동을 거쳐 건입동의 제주항까지 흐른다. 제주시의 원도심 한복판을 흐르는 하천이다. 



김만덕 기념관


김만덕 기념관이 산지천과 건입포를 바라보고 들어서 있다. 올레길 갈길이 천 만리인데 이곳을 나중에 갈까, 지금 갈까 고민하다 들어갔다. 이 길을 제대로 만끽하기 위해선 빠르게 보단 느리게가 중요하다. 


제주는 역시 여성의 섬이라는 것을 이 곳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옛 흔적에 환장하는 나임에도 귤림서원이나 오현단에서 그다지 감동을 받지 못했는데, 여기 김만덕 기념관과 조금 지나 있는 김만덕 객주터에서 옛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을 느낄 수 있었다. 김만덕 기념관은 자금적으로 풍요로운 느낌이 들었다. 김만덕! 이름은 그렇게 들리지 않지만 여성이다. 기녀이기도 했고, 제주 출신 여성인데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CEO라고 하니 대단한 분이다. 우리나라엔 과거 수많은 김만덕이 있었겠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김만덕은 남성에 의해 '역사'로 기록되었기에 지금도 전해진다. 역사가 남성들의 것임을 되새긴다. 오원집, 추재집, 고식, 운곡집, 금대시문초, 이향견문록, 승정원일기, 정조대왕실록, 번암집, 여유당전서, 정유각문집 등에 김만덕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또, 추사 김정희가 '은광연세(은혜의 빛이 온 세상에 퍼진다)'라고 써서 김만덕의 3대손인 김종주에게 써준 편액도 남아있다. 요새로 치자면 성공한 CEO가 유튜브에 나와서 이름을 날리는 것과 같다. 


남성들의 역사에 기록된 여성 김만덕


김만덕은 물산 객주를 운영한다. 제주의 특산물인 말총, 전복, 귤 등을 육지에 팔고, 육지의 옷감, 장신구를 들여와 제주에서 팔았다. 또, 육지의 쌀과 소금을 들여와 시세차익을 크게 남기고, 자신의 배까지 소유하고 선상을 유치하여 포구의 전 상권을 제 손아귀에 넣은 제주 최고의 거상이 된다. 그러다 1794년(정조 18년) 극심한 흉년이 드는데 이를 갑인흉년이라고 한다. 이때 만덕은 자신의 재산을 내어놓아 굶주린 백성을 구휼한다. 중앙에서 보내온 구휼미도 바다에 처박혀 제주에 제대로 도달하지 못하는 상황이라서 김만덕의 업적은 더욱 높아질 수 있었다. 


김만덕의 기민 구휼


김만덕의 선행이 조정에 알려져 정조가 소원을 물으니 서울에 가서 왕궁을 보고 싶고, 금강산을 가보고 싶다고 한다. 애초에 시야가 큰 분이다. 그리고 결국 이 소원 모두 이루고, 제주에 돌아와 장사를 하면서 제주도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다 1812년(순조 12년) 돌아가신다. 김만덕의 묘비문은 여성임에도(여성이니까!) 당당히 그 이름과 삶의 행적이 적혀 있어 역사적 의의가 있다. 김만덕 묘지는 현재 사라봉 모충사로 옮겨졌고, 제주에서는 만덕제를 열며 김만덕을 기리고 있으며 김만덕상도 수상하고 있다. 만덕제를 드리는 영상이 나오는데 제사를 거행하는 분이 여성 제관이라 더욱 인상적이다. KBS에서 2010년에 거상 김만덕 드라마를 했다고 하니 찾아봐야겠다. 


김만덕 제를 올리는 여성 제관


올레길을 걷지 않더라도 제주 옛 도심과 산지천을 구경하러 왔다면 들러보면 좋을 것이다. 관람료는 무료이다. 홈페이지도 김만덕 소개뿐만 아니라 김만덕 재단과 나눔 문화에 대해서도 쓰여있는 등 많은 정보가 담겨 있다. 


김만덕 기념관 : http://www.mandukmuseum.or.kr/


건입포의 김만덕 객주


제주의 최북단인 건입포는 육지와 제주를 잇는 관문이었다. 바로 이 곳에 김만덕이 객주를 차렸으니 일단 부동산 선택이 탁월하다. 김만덕 객주는 재현되어 있고, 그 안에 실제로 음식을 팔고 있다. 여기서 먹으면 조선시대로 돌아간 느낌이 들 것 같아 다음을 기약해본다. 




제주 항과 주정공장터


건입포를 물려받아 이 곳엔 제주항이 있다. 이번에 제주를 들어올 때 목포에서 배를 타고 들어왔는데, 이곳이었음을 이제야 제대로 안다. 올레길의 좋은 점은 스쳐지나 보냈을 공간들을 천천히 곱씹어 볼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거대한 부두들을 보면서, 제주항 여객 터미널을 향해 가다 보면 곧 주정공장 옛터가 나온다. 이 곳은 텅 빈 곳에 눈물방울 모양의 조형물과 끌려가는 사람 조각이 있다. 1943년 설립된 동양척식 주식회사 제주 주정공장과 그 창고가 있던 곳이다. 당시 제주도에는 '공장'이라고 한다면 제주도 내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이용한 산업만이 가능했다. 그래서 제주도에서 생산되는 고구마를 원료로 하는 주정(酒精) 공장이 세워진다. 당시로선 비교적 큰 공장이고, 창고도 딸려있었다. 이 주정공장 창고가 4.3 당시 민간인 수용소로 이용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수용되어 있다가 죽거나 바다에 수장되거나 정뜨르 비행장(현재 제주 국제공항)에서 학살되었다. 수장된 이들은 물론이고, 공항에서 학살되어 국가 시설이라 그 유해도 찾지 못한 유족들이 많으니 제주 공항을 이용할 때도 꼭 4.3으로 희생되신 분들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https://www.visitjeju.net/kr/detail/view?contentsid=CNTS_000000000022885


사라봉으로 향하는 건입동 마을길


이제 건입동 마을길로 올라간다. 김만덕 기념관에서도 느꼈는데, 비슷한 느낌을 건입동에서도 받았다. 건입동도 금전적으로 부유한 느낌이다. 마을길은 벽화로 잘 장식되어 있고, 올레길 18코스 표시도 다른 올레길에선 볼 수 없게 땅바닥에 크게 그려놓았다. 제주항과 그 너머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아주 멋있는 동네이다. 건입동은 칠머리당 영등굿으로도 유명한데 음력 2월에 바다의 평온과 풍작, 풍어를 기원하는 굿이다. 원래 건입포 칠머리에 있었으나 현재는 사라봉으로 이전했다고 한다. 영등굿은 이 곳 칠머리당뿐만 아니라 음력 2월에 제주 곳곳에서 열린다. 영등신은 음력 2월 초하루에 제주 섬을 찾아오는 신이다. 해녀들은 이 달 초하루에 영등신이 찾아와 해산물을 주고, 15일에 본국으로 돌아간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리고 영등신이 떠나면 제주의 봄이 시작이라고 한다. 


사라봉 입구에 위치한 영등굿 올리는 제단



이름도 예쁜 사라봉


이제 곧 사라봉이 나온다. 사라봉을 시작하자마자 일제 동굴진지가 나왔다. 일본이 파 놓은 아니, 일본에 의해 동원되어 조선인들이 판 동굴들을 많이 보고 싶었는데, 이 곳에서 처음 보았다. 이 시설물은 제주 북부 해안으로 상륙하는 연합군의 저지를 위해 만들었다. 제주 동비행장(진드르 비행장)과 서비행장(정뜨르 비행장)을 사수하기 위해 구축하였다. 



사라봉 148.2m를 올라 정자에서 제주시와 항구 그리고 바다를 굽어본다. 분명히 시작할 땐 쨍했는데, 올라와보니 조금 흐려있다. 섬 날씨는 오락가락한다. 



내려오며 사라봉 해송숲을 구경한다.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라는 대회가 있는데, 시민의 숲 부문에서 아름다운 어울림상을 2010년에 수상했다. 이 오름에서는 여태까지 올레길을 걸으면서 올랐던 오름들과는 달리 많은 마을 사람들이 산책과 운동 삼아 이용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제주에는 영주10경(瀛州十景)이라는 게 있다. 제주에서 경관이 뛰어난 열 곳을 조선 말기 제주의 지식인 매계 이한우가 시적인 이름을 붙여놓은 것이다.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제1경 성산일출 (城山日出) - 성산의 해돋이  

    제2경 사봉낙조 (紗峯落照) - 사라봉의 저녁 노을  

    제3경 영구춘화 (瀛邱春花) - 영구(속칭 들렁귀)의 봄꽃  

    제4경 정방하폭 (正房夏瀑) - 정방폭포의 여름  

    제5경 귤림추색 (橘林秋色) - 귤림의 가을 빛  

    제6경 녹담만설 (鹿潭晩雪) - 백록담의 늦겨울 눈  

제7경 영실기암 (靈室奇巖) - 영실의 기이한 바위들  

    제8경 산방굴사 (山房窟寺) - 산방산의 굴 절  

제9경 산포조어 (山浦釣魚) - 산지포구의 고기잡이  

제10경 고수목마 (古藪牧馬) - 풀밭에 기르는 말  


여기서 성산일출봉에서 보는 해돋이 다음으로 제일 가는 풍경이 바로 사라봉 정상에서 보는 노을이란다. 꼭 보고싶다. 


18코스 최고의 풍경 : 별도봉


사라봉(표고 146.2m), 알오름(96.1m), 별도봉(135.5m)는 서로 연결된 오름군이지만 생길 때는 각자 알아서 생긴 단성 화산들이다. 사라봉과 별도봉 분석구는 자연스럽게 이어지는데 이 길이 18코스의 백미이다. 넓은 바다 그리고 항을 위한 방파제, 그리고 계속 들리는 항구의 분주한 소리가 파란 제주 바다와 맞닿은 해안 경사와 어우러진다. 오직 이 곳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으로 내내 감탄하면서 걸었다. 마을 사람들로 보이는 분들이 많이 보였는데 너무 부러워졌다. 이 풍경을 매일매일 운동하면서 볼 수 있다니! 


별도봉 북쪽으로 수직의 주상절리대가 발달해 있다. 항구 쪽에서 바라보면 제대로 보인다. 약 40m 높이의 절벽으로 하단부에는 파도에 의한 침식 작용으로 만들어진 지형 '고래굴'이 있다.



별도봉은 두 종류의 화산 분화 형태를 가지고 있다. 먼저 수성화산 분화로 응회암층이 생겼고, 이후 폭발로 분석구를 형성했다. 별도봉의 정상부에 '애기업은돌' 이란 별칭을 가진 기암괴석이 나오고 곧 별도봉을 내려오면 화북동이 된다.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


곧 쓸쓸한 곤을부락이 나온다. 이 곳이 바로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이다. 화북천을 끼고 있고, 바로 앞은 바다인 곤을동은 물과 해산물이 풍부한 동네였을 것 같다. '곤을'이라는 뜻은 항상 물이 고여있다는 땅이라는 뜻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4.3 당시 아예 초토화되어 터만 남아있는 곳이 바로 곤을마을이다. 집과 집을 구분해 줬을 돌담만 쓸쓸하게 남아 있다. 1949년 1월 4일 아침 9시경 군 작전으로 마을 사람들이 희생되고 모든 가구가 전소되었다. 67호로 구성되었던 마을이 단 이틀 만에 사라졌다. 4.3 당시 전소된 가옥만 30,000 여채에, 잃어버린 마을만 100개소에 이른다. 



전혀 죄 없는 사람들을 다 죽여 놨지. 자기 이름도 못 쓰는 사람들을 다 죽였어. 군인들이 와서 집에 있는 사람들 잡아놓고 물가에 세워 놓고 죽였주. 죽인 날부터 불붙이기 시작헌거라. 석유병을 집안 기둥에 항상 걸어놨었어. 석유병 꺼내서 촐[꼴] 한 묶음이나 조짚, 보릿대에 불을 붙여 집을 태웠어. 돼지도 다 불타서 죽고, 소도 불타서 죽고, 초가집이니까 쉽게 불이 붙었주. 화북에서 제일 피해가 커. 곤을은 따로 떨어진 곳이니까 불을 붙여 버렸지. 사람을 못살게 해버린 거지. 원원! 시뻘겋게 집 하나도 없어. 하늘이 시뻘겋게 됐었지. 사람도 죽고 집도 불붙고 그러니까 그곳에 사람이 없어져 버린 거라. (안명호, 남, 증언 당시 67세)


http://43archives.or.kr/viewHistoricSiteD.do?historicSiteSeq=34


곤을동과 바다를 정면으로 내려다보는 카페에서 잠시 쉬고, 바다를 따라 걷는다. 



제주로 들어오는 곳 : 화북포


곧 화북포구가 나온다. 이 곳은 옛날에는 해상교통의 관문으로 왕명을 받은 사신이나 관리들이 드나들었던 곳이다. 화북포는 조천포와 더불어 옛 제주의 해상 관문이었다. 부임하는 목민관이나 추사 김정희, 최익현 등 유배인들도 이 포구를 통해 들어왔다고 한다. 제주 목관아에서 5km 밖에 떨어지지 않았으니 부임하는 관료들 또는 떠나는 관료들, 유배인들이 이용할 때 가장 가까운 포구였다. 광해군이 화북포구가 아닌 올레 20코스에서 본 행원포구로 들어온 것은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겠다고 짐작해본다. 


화북포구가 좁아서 바람이 심하면 배들끼리 부딪쳐 파선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1734년(영조 11년) 목사 김정은 포구 확장 공사를 벌인다. 공사 중에 직접 등짐을 지고 돌을 날라 부역에 동원된 사람들을 격려했는데, 이때 과로한 것이 원인이 되어 돌아가셨다. 진짜 그냥 돌만 날라서 그런 건 아니겠지? 그럼 너무 나약한 조선 선비 같잖아! 아마 지병이 있었을 것이다. 



지나가는데 뭔가 엄청 오래돼 보이는 건물이 있다. 화북지서 옛터 표지석이 있어 보니 역시 4.3의 흔적이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이 화북지소를 습격하고 건물을 태워버린 곳이라고 한다. 





화북포의 해신사 


화북 포구를 빙 돌다 보면 해신사가 나온다. 해신사는 1820년(순조 20년) 제주목사 한상묵이 화북포구에 설립하고 1841년(헌종 7년)에 제주목사 이원조가 중수하였다. 1849년(헌종 15년) 제주목사 장인식이 '해신 지위'라고 새긴 위패를 안치하였다. 이후 해신사는 선박이 출범하기 전에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일제에 의해 폐지된 이후 해신제는 화북마을 어부와 해녀를 중심으로 사고 없고 풍요로움을 비는 제사로 바뀌었다. 현재는 음력 1월 5일에 제를 올리고 제관 5명이 제사를 주관한다. 해신사의 문은 굳게 닫혀있다. 




별도 환해장성과 별도연대


용천수와 원담을 보며 걷다 보면 별도연대와 별도 환해장성이 나온다. 김상헌의 『남사록』에는 환해장성을 일러 ‘탐라의 만리장성’라고 하지만 이 곳에 남아 있는 별도 환해장성은 오직 600m 정도뿐이다. 




삼양 해수욕장을 향하여


이어 마을길로 들어섰다. 화북동을 뒤로하고 삼양동으로 들어가면 벌낭포구와 새각시물이 나온다. 여자의 몸매를 닮았다고 하여 새각시물이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어디가 어떻게 닮았다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해변을 따라 걸으면 삼양 검은 모래 해수욕장이 나온다. 이 곳에도 카이트 서핑이 있다. 서핑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삼양 해수욕장 정자에서 18코스 중간 스탬프를 찍고 17시 35분에 18코스의 반을 마무리 지었다. 아침부터 아라리오 뮤지엄에서 현대 미술을 보고 오현단 조선 유학자들을 보고, 멋진 여성 김만덕을 보고, 곳곳에 4.3 흔적들도 보며 오름도 오르락 내리락 했더니 엄청 많은 input이 들어와 머리가 과포화가 된 느낌이다. 더 이상의 input 은 사양하며 다음에 주차할 곳을 잘 봐 두고 버스를 타고 칠성 공영 주차장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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