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이리 와서 전 좀 같이 부치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추석을 앞두고 시댁에 내려와 명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늘 그랬듯 주방에서 먹지도 않는 전을 기름 냄새 맡아가며 종류별로 만들고 있는데, 남편은 언제나처럼 홀로 딴 세상에 가 있었다. 거실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는 모습이 한두 해 얄미웠던 게 아니지만, 그날은 유독 더 얄미웠다. 집에서는 제법 집안일도 알아서 하는 남편이 자기 본가에만 가면 갑자기 딴사람이 돼 버렸다. 자기 영역이라고 텃세라도 부리는 건가? 귀는 안 들리고, 눈은 안 보이고, 입은 밥 먹을 때만 사용하기로 한 것 같았다.
대학교 때 여성학 강의에 심취해 페미니즘을 줄기차게 외치던 나였는데 결혼 후 시댁에서 찌그러진 모습으로 순응하며 지내는 걸 더는 내 자존심이 용납을 못 하겠다. 한두 해 이렇게 지낸 것도 아닌데 새삼 이런 마음이 든 건, 이제 시댁의 눈치를 덜 보는 ‘며느리 연차’가 좀 쌓였다는 방증이겠지. 나는 더 이상 새댁이 아니니까.
주방에 와서 전 좀 부치라는 말은 솔직히 남편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내 아들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다는 시어머니께 선전 포고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결혼 초 시댁에 갈 때마다 남편이 초등학교 때부터 받은 상장이나 어렸을 적 사진을 보여주시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아들 자랑을 늘어놓으시던 분이셨다. 시누이들마저 아들을 제일 귀하게 여기는 어머니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였으니, 어머니의 과한 아들 사랑은 나에게 불편 그 자체였다. 그러니 선전 포고를 하려면 머리를 잘 굴려야 한다. 적의 본진에서의 전쟁은 불리하다는 것쯤은 군대를 안 나와도 알 수 있는 거 아닌가. 큰 반발을 피하려면 최대한 살살, 농담처럼 툭 던져야 한다. 목소리의 톤과 상냥함의 정도를 치밀하게 계산한 후 드디어 공격 개시! 남편이 머쓱한 듯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들어오고, 어머니는 모르는 척 넘어가 준다면 작전은 대성공이다.
“여보~~~ 이리 와서 전 좀 같이 부치자~~”
첫발은 불발. 역시나 남편 귀는 시댁에서 제 기능을 안 한다. 내 목소리가 허공에서 사라지는 동시에 어머니의 불편한 기색이 느껴졌다. 다시 한번 발사. 이번엔 평정심을 유지하는데 실패해서 짜증이 좀 섞여 버렸다. 그래서였는지 기대와는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아들, 주방에 절대 못 들어오게 해라. 내가 손에 물 한방을 안 묻히고 키웠다”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주방에서 함께 음식을 준비하시던 어머니가 평소보다 톤을 높여 말씀하셨다. 밀고 나가느냐, 이대로 후퇴하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여기서 물러서면 본전도 못 찾고 패한다. 이 말을 꺼내는데 무려 5년이나 걸렸는데,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다.
“어머… 어머니, 저도 마찬가지예요. 저도 우리 집에서 손에 물 한방을 안 묻히고 자랐어요”
“우리 아들은 귀한 아들이니까”
“어머니 저도 얼마나 귀염받고 자랐는데요. 귀한 막내딸이에요. 호호”
5년 차 며느리도 이제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대화는 농담과 진담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나들며 서로 한 치도 양보하지 않겠다며 팽팽할 즈음.
“우리 아들은 홍씨 집안 대를 이어야 하니까..!!!”
어머님의 얼토당토않은 핵폭탄급의 공격에 나는 당황스러워 꼼짝할 수가 없었다.
‘네???? 어머니! 대를 이어야 하는 그 아이는 대체 누가 낳는 건데요?? 제가 낳는다고요!!!!!’
너무 화가 나서 하마터면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뻔했다. 남자가 대를 잇는다니. 어느 시대의 발상이란 말인가? 아무리 시어머니라고 하지만 나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이잖아. 어머니 말대로라면 그 애는 내가 낳는다고요. 하지만 더는 대응을 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무슨 험한 말을 더 들으려고. 어머니는 아무런 말도 못 하는 나를 보며 멋쩍은 듯 승리의 미소를 띠며 주방을 나가버리셨다.
결국, 소심하게 일으킨 반란은 한 방 제대로 얻어 맞으며 끝나고 말았다. 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는 게 아닌데, 더 이상 대응할 수 없는 며느리는 억울했다. 그래도 고부 갈등의 막장 드라마를 찍고 싶진 않으니까.
어느덧 나는 결혼 14년 차가 되었다. 5년 차 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아는 것.
그날의 사건은 전을 부치고 안 부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한 남자를 두고 아들과 남편에 대한 소유권을 상대에게 뺏기지 않겠다는 치열한 전투였다. 내가 이렇게 부끄러운 싸움을 일으켰다니. 남편에 대한 지분 경쟁에 에너지를 쏟고 마음에 상당한 타격까지 받았다니 이제 와 억울하다. 여자 둘이 전투를 치르는 동안에도 소 닭 보듯 관심 없던 그 남자가 뭐 그리 좋다고. 시댁의 분위기를 바꾸고 싶으면 어머니와 신경전을 벌일 게 아니라 남편을 바꾸면 될 일인걸. 그래서 지금 우리 남편은 변했냐고? 음. 그건 상상에 맡기고 싶다. 중요한 건 나는 더 이상 포탄을 들고 직접 뛰어들지 않는다. 남편이라는 무기를 요리조리 잘 쓰는 참모가 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