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사랑. 삶의 이유

by 아솔

미정은 언니와 밤새 이야기를 나누다 잠이 들었지만, 이른 새벽에 눈이 떠졌다. 안방 문을 살짝 열어보니 아빠가 창 밖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 벌써 일어나셨어요?” “미정아, 여기서 이렇게 창문을 바라보고 있으면, 네 엄마가 운동하고 나와서 저기 시장 입구에서부터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지금도 딱 그럴 시간 이거든. 네 엄마가 저기서 웃는 얼굴로 막 보여야 할 때인데…”



아빠는 말을 다 잇지 못한 채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빠가 며칠 사이로 부쩍 늙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미정은 아빠의 눈물이 낯설기도 하고 한없이 작아진 아빠에 대해 연민의 감정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원망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아빠는 이렇게 후회할 거면서 왜 진작 엄마한테 좀 더 다정하게 대해주지 못했던 걸까.




미정의 기억 속 아빠, 엄마는 항상 다투는 모습이었다. 사업 실패 후, 아빠는 집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냈지만, 술을 마신 날에는 엄마에게 크게 소리쳤고, 그런 날은 늘 어김없이 크고 작은 싸움으로 번졌다. 아빠는 엄마같이 남편을 무시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거라며, 늘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자식들은 그런 아빠 편을 들 수 없었다. 누가 봐도 삼 남매를 키우기 위해 고생하고 있는 건 엄마였으니까.


adismara-putri-pradiri-7bs98gj_8ys-unsplash.jpg 사진출처 @unsplash


장례 이후, 자식들은 슬픔 가운데서도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의미를 찾아가는 방향으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지만, 가족 중 유일하게 아빠는 점점 더 절망과 우울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아빠는 식구들이 같이 모여서 식사를 할 때도 눈물을 흘렸고, 술 한잔을 한 날에는, 당신이 엄마를 얼마나 생각하며 살았는지 아느냐고 절규하며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아빠에게는 당신의 말에 백 번 공감해주고 따뜻하게 위로해 주는 것만이 필요한 때라는 걸 모르지 않는 자식들이었지만, 지난날 아빠가 엄마를 대했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지금의 아빠의 모습을 전부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모질게도 그럴 거면 진작 잘하지… 라는 말이 미정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오랫동안 피해자가 된 것처럼 엄마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아빠는 엄마를 떠나보내고 못 견디게 힘들어하는 반면 엄마가 떠날까 봐 평생을 두려워하던 자신은 어떻게 엄마의 죽음을 생각했던 것보다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건지 미정은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애착이 컸던 만큼 그런 날이 오면 자신은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 빠져서 결코 헤어 나오지 못할 거라 생각했었는데, 그런 모습을 보인 사람은 의외로 아빠라니.




한참을 고민해 본 끝에 미정은 한 가지 생각에 도달했다. 사람의 본성은 사랑을 내어주는 존재여서 사랑과 멀어질 때 괴로움을 느낀다는 것. 아빠는 마음에 간직하고 있던 사랑을 내주지 못해서 후회하는 것 같았다. 다정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긴 시간을 보냈지만, 아빠도 엄마에게 가진 사랑의 마음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 마음을 꺼내놓지 못했던 탓에, 대상을 향해 있던 사랑이 대상을 잃어버린 순간 후회와 절망으로 변해버린 건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면 엄마 또한 생의 마지막 순간 아빠에 대해서는 아쉬움과 후회의 마음이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관계 속에서 느끼는 감정은 함께 만들어가는 상호작용이니까. 반면에 미정은 평생 엄마 바라기였다. 막내딸로 무조건적인 엄마의 사랑을 받는 것을 당연하다 여기고 그저 기쁘게 누렸다. 미정의 삶 어디를 둘러봐도 엄마의 헌신과 사랑이 넘쳤다. 미정 또한 엄마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그 마음을 숨기지 않고 엄마에게 고스란히 전하므로 미정과 엄마 사이에는 감정의 아쉬움 없이 서로 사랑을 주고받음이 충만했다. 너무나 흔해서 상투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사랑이라는 말이 미정에게 완전히 새롭게 받아들여지는 순간이었다. 미정이 지금 이 순간을 버틸 수 있는 이유는 오직 단 하나, 지금까지 엄마에게 받아온 사랑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다.


mathilde-langevin-r2KSbxCVlxU-unsplash.jpg 사진출처 @unsplash

사랑의 힘은 죽음을 초월할 수 있다는 말이 이런 의미였던 걸까? 이와 동시에 미정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사랑을 남김없이 줘야 나중에 죽음이 오는 순간 아이들에게 가장 큰 선물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그 대상은 아이들뿐만이 아니라, 남편과 가족들부터 미정의 삶에서 관계하는 많은 사람들에게까지 확장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가장 큰 축복으로 다가온다. 그렇다면 사랑의 대상을 잃은 아빠는 영영 후회와 절망 속에서 살아야 하는 걸까? 물론 아닐 것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아빠는 스스로를 인정하고 자신을 용서함으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그 길은 아빠가 용기를 내고 스스로 찾아야 하겠지만. 미정은 더 이상 아빠를 원망하지 않고 아빠의 시간을 인정하기로 했다. 아빠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라 믿고, 있는 그대로의 아빠를 바라보고 마음으로 지지하기로. 아빠가 부디 너무 늦지 않은 시간에 사랑의 마음을 회복할 수 있기를.



사람은 자신이 가진 사랑을 펼쳐내기 위해 태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살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관계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임무가 삶의 이유일지도. 불교에서는 윤회를 이야기하는데, 어쩌면 누군가에게 빚진 마음이 남지 않는 삶을 살게 될 때까지 계속 새롭게 기회를 얻게 되다는 의미는 아닐지. 그것은 세상을 유익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고, 결국 자신을 위한 일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사랑의 존재여서 사랑을 줄 때 주체인 자신이 가장 행복해지니까. 미정은 자신이 사랑을 받았던 것처럼 사랑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충만해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