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이제야 나는 존엄한 죽음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아직도 글을 쓰려면 아빠 생각이 나고 눈물이 차 오르고, 슬픔이 온몸을 휘감는다. 그래서 책상에 앉아서 또는 작년 일 년 동안 작성하던 일기도 그렇게 놓아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다시 시작을 해야 할 때! 아빠를 보내드릴 때와 보내드린 뒤 어떠했는지를 복기해보려고 한다.
아빠는 중환자실에 17일간 누워계셨다가 돌아가셨다. 처음에는 온전하던 아빠의 얼굴도 변하고, 머리와 몸도 씻지 않아 엉망이고, 입에는 지속적인 인공호흡기 착용으로 인한 상처들 하며, 멀쩡한 곳이 한 곳도 없는 상태셨다.
보름을 견디다가 우리는 다시 의사 면담을 신청했다. 항생제 내성 슈퍼박테리아가 발견되어서 중환자실에서도 격리실에 갇혀계신지도 벌써 열흘은 지난 시점이었다. 아무래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래서 이다음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다시 의사 면담을 신청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의사 선생님이 좋은 분이셨다는 거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으니 이제는 아빠가 돌아오실 수 있는 가능성이 아주 희박한 게 사실이라고 의사 선생님도 동의하셨다. 그리고 아무래도 근처의 요양병원으로 모시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하셨다. 그렇게 하겠다고 했고, 그렇게 하기 전에 숨은 본인이 쉬시는 것인지 인공호흡기는 꼭 필요한 것인지를 논의했다. 사실 본인이 숨을 쉬는 게 아니라 온전히 인공호흡기에 의존하시는 것이면 그게 또 무슨 의미일 것인가... 그래서 물어본 건데, 의사 선생님도 가족들이 모두 원한다면 인공호흡기도 떼도록 하겠다고 하셨다.
이번에는 수혈이나 투석을 결정하는 것보다 쉬웠다. 가족들이 모두 아빠를 이렇게 곁에 두는 것을 원하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인공호흡기도 떼기로 했다. 엄마와 내가 있는 동안 의사 선생님은 인공호흡기를 떼셨고, 조금 기다리다가 집으로 돌아가서 연락을 기다리란다. 기다리는 동안 산소포화도가 엄청 떨어졌단다.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니 전화 꼭 받으라는 당부의 말을 듣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갔다. 저녁에 다시 병원에 전화를 했는데, 산소포화도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갔단다. 안심이다.
불편한 마음이지만 잠을 청했다. 11월 9일 새벽 2시, 전화벨이 울렸다. 스프링처럼 튀어올라 전화를 받았다. 빨리 병원으로 오라는 전화였다. 덜컹거리는 가슴을 안고 엄마와 병원으로 달려갔다. 아빠의 임종을 보지 못했다. 그렇게 우리는 아빠를 보내드렸다.
조부모님의 죽음을 지켜보긴 했지만, 그때도 나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 볼 기회가 없었다. 조부모님의 죽음은 부모님의 눈과 입을 통해서 전달되는 경험이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아빠를 보내드리면서 나는 존엄하게 죽는 게 어떤 것인지 깊게 생각해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