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내내 괜찮다가 마지막 주에 가서야 병이 나는 사연
길었던 방학이 눈 깜짝할 새 지나가고, 벌써 개강이 코앞이다. 매 학기 겪는 일이지만 개강을 앞두고 일주일 열흘 정도는 몸 안에서 좋지 않은 호르몬이 왈칵왈칵 분비되는 느낌이 들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 기간이 싫어서 차라리 방학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순전히 기분 탓은 아닌 것이 개강 직전에 구내염이나 설염을 겪는 일이 흔하다. 방학 내내 놀았는데(?) 피곤해서 걸린다는 구내염, 설염으로 모자라 이번에는 침샘염이 생겼다. 턱밑에 뼈 없이 말랑말랑한 부분을 누르면 약간 불편한 느낌은 늘 있었는데, 이번엔 통증이 상당히 날카롭고 손을 떼어도 한참 지속되는 것이다. 이비인후과에 갔더니 침샘염이란다. 항생제를 먹고 염증이 가라앉으면 혹시 침샘에 결석이 있는지 CT를 찍어보자고 한다.
말로 먹고사는 사람이다 보니 입병이 나면 상당히 괴롭다. 특히 개강을 앞두고 이런 병에 걸리면 개강 전에 빨리 나아야 한다는 강박까지 더해진다. 항생제 부작용인지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도 좀 어질어질. 컨디션이 말이 아니다. 어제는 울렁거림을 좀 달래 보려고 자극적인 맛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는 코다리 냉면을 먹었는데, 그마저도 잘 넘어가지 않아 반이나 남겼다. 식사를 마치고 나올 때는 어지럽기까지 해서 잠깐 쭈그려 앉아 정신을 차려야 하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행히도 살살 걸으면서 정신이 맑아져서 무사히 집에 돌아오기는 했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개강이 이렇게까지 힘든 이유가 뭘까? 주변의 교수들이나 교사들과 얘기해 보면, 다들 개강과 개학이 싫지만 막상 학교에 가면 오히려 좋다고 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젊고 건강한 학생들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마법을 부린다. 아침에 일어나 씻고 꾸미고 나가는 것 자체도 활력을 준다. 그런데도 개강을 앞두고 몸과 마음이 이렇게 힘든 것은 아무래도 "사회생활"이라는 상황이 주는 긴장감 때문인 것 같다.
교수들도 예전과는 달리 여러 종류의 실적 압박이 심하고, 불편한 생존 경쟁에 내몰리기도 한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만 해도 방학 직전에 신규 채용을 둘러싼 갈등이 있었다. 학령인구가 감소하는 데다가 문과라서 죄송하다는 분위기까지 더해 학부의 전망이 어둡기만 한 가운데, 이대로는 다 같이 죽는다면서 신규 채용을 주장하는 교수들이 있다. 젊은 피를 수혈해서 세상의 변화에 대응하고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반면, 학생 수 감소로 이미 재직 중인 교수들의 입지도 흔들리는 마당에 신규 채용은 신중해야 한다는 교수들도 있다. 양쪽 다 일리가 있는 주장인 만큼, 결론을 내지 못하는 와중에 일종의 사고처럼 채용 공고가 나가버렸다. (이 사고의 전말을 여기다 적기에는 너무 부끄러워서 생략하도록 한다)
방학 동안 진행된 채용은 지원자 중에 적임자가 없어서 불발되었다. 그런데, 며칠 전 채용 공고를 다시 내자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갈등은 다시 한번 고조되었다. 논리적인 주장을 펼치는 동료가 있는가 하면 감정을 섞어가며 싸우듯이 주장을 펼치는 동료도 있다. 감정적으로 격하게 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보통은 대꾸하지 않는 방법을 택한다. 그러면서 논의는 방향을 잃고 표류하다가 엉뚱하게 일종의 사고처럼 결론이 나 버리는 것이다. 이번에도 그리하여 채용 공고를 다시 내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다.
공고가 나간다고 해도 채용은 또 불발될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신규 채용을 둘러싸고 일어난 갈등과 반목은 동료들 사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꼭 신규 채용이 아니더라도 이슈가 있을 때마다 드러나는 인식의 차이는 그저 다르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서로를 멀어지게 한다. 그렇게 껄끄러운 사람들과 다시 만나서 부대껴야 하는 상황이 나로 하여금 개강을 이토록 부담스럽게 만드는 것 같다. 같은 반 친구와 싸운 후 화해하지 못한 채 매일매일 학교에 나가야 하는 아이의 마음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적고 보니, 내가 한가한 불평을 늘어놓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방학이 없는 대부분의 직장인은 동료 상사 후배들과 감정적으로 부딪힌 바로 다음 날 아침 아무 일 없는 듯 출근하는 운명을 받아들인다. 방학이라는 긴 치유의 시간을 가진 내가 동료들과 부대끼기 불편하다고 징징거린다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서로 얼굴 붉힐 일 없이 어깨동무를 하며 위아더월드를 부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세상에 그런 직업이 어디에 있겠는가. 감정 노동이라는 말도 있고, 월급의 반은 욕먹는 값이라는 말도 있는 마당에! 판타지 같은 생각은 내려놓고, 운동과 명상으로 마음을 달래며 개강 준비를 해야겠다.
p.s. 방학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는 아이들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하는 규칙적인 생활에 대한 부담감, 불편한 교우 관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와 비슷한 불편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개학증후군, 혹은 새학기증후군이라고 불리는 이 현상은 주로 3월 새 학년을 앞둔 시점에 이슈가 된다. 나의 개강 전 증후군과 본질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다. 어린 시절 개학증후군의 기억은 없는데 이 나이에 개강증후군이라니! 내가 나이를 거꾸로 먹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