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는 마음
타일, 미장, 도배, 조적......
듣기만 해도 후들후들한 단어들이다.
매일 같이 요리를 하며, 칼을 쓰고, 육수를 끓이고, 쌀국수를 담갔던 내 손에 장갑을 끼고, 시멘트를 섞고, 고데를 쥐고, 빠데를 들고 벽에 하염없이 시멘트를 바르는 일을, 손이 하얗게 될 때까지, 못에 실을 끼우고, 망치를 들고 수평을 잡는 일을, 그라인더를 들고 하트 모양 타일을 자르는 것을...
내가 할 게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2018년 나는 바지사장으로 일했던, (말이 바지 사장이지, 이해하기 쉬운 표현이므로, 실은 나에게 맡기고 진짜 대표님은 다른 지역에서 일을 하고 있던 터라서, 나에게서 월세며, 기타 다른 것들을 모두 내라고 하고, 본인은 100만 원만 달라고 하던 일이었다. 하지만 내 월급보다 비싼 월세와 관리비, 거기다 엄마와의 불화로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야 했던 일을 나는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 쌀 국숫집 일을 그만두고, 실업급여를 신청하고서 제일 처음 찾아간 곳은 다름 아닌 직업학교였다.
직업학교는 특성상 나이와 연령을 불문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여주는데, 내가 다닌 곳은 시장 근처에 있는 건설 노동자를 위한 직업학교였다.
나의 선택은 너무나 갑작스러운 것이라서, 가족들도 모두 의아해했지만, 다들 아무런 말을 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내가 얼마 다니다가 못 견디고 나올 거라는 예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미장부터 시작해서 타일까지 마치고, 거의 8개월을 다녔다.
실업급여가 끝난 후에도 다녔고, 실습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했으니, 모르긴 몰라도 주변 사람들이 꽤나 놀랐을 것으로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열정적으로 다닐 수 있었던 것은, 학교에 계셨던 수많은 아버지들 때문이다.
처음에 내가 직업학교를 선택한 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어서였는데, 이유는 단 하나, 더 이상 엄마와 일을 하지로 다짐했기 때문이었다.
엄마와 멀어져야 내가 살 수 있을 거라는 그 다짐 때문에 나는 직업학교를 열심히 다녔다.
물론 다니고 나서 알았지만, 미장도 혼자서는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다른 모든 일들도.
그러나 시간이 아주 오랜 흘러서는 혼자서 하시는 분들도 꽤나 많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지만 그 세월까지 내가 견딜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고, 일단 나는 무조건 미장을 배우겠다고 선생님을 찾아갔다.
35살의 여자가, 그것도 길었던 머리는 짧게 자르고, 심지어 아무런 사전 지식도 없이 온 사람이 선생님은 아마도 신기하셨던 것 같다.
선생님의 연세는 거의 80에 가까우셨는데, 듣고 보니 아직도 현역에서 움직이시는 미장계의 대부셨다.
어쩐지...... 말투가 자상하지 못하시고, 엄청 힘들게 알려주며 겁을 주시더라니...
게다가 그때 미장반에는 여자가 나 혼자 밖에 없어서 인지,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함을 나는 알 수가 있었다.
물론 사연도 무지하게 궁금하셨겠지만......
나는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필요한 말 이외에는 거의 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는 편인데, 미장을 배우면서 벽과 마주 보고 하루에 3번 벽에 시멘트를 바르겠다는 의지로 버티다 보니, 벽이 곧 내 친구가 되었고, 내 말을 들어주는 이가 되었다.
늘 그렇듯 모든 건 실전처럼 해야 하는 데, 특히나 건설 노동자 직업학교의 특성상, 이론 수업은 거의 없다. 거의 실기로만 행해지는 데,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진짜로 잡아 본 것이라고는 연필과 칼 그리고 주걱과 국자뿐이었는 데, 그런 나에게 선생님은 고데와 빠데를 주면서 동시에 시멘트 섞는 법도 같이 알려주시는 거였다.
매일 아침 오는 사람이 시멘트를 섞는데, 아마도 내가 일찍 오게 되면 내가 섞어야 하고, 아니면 중간중간 휘퍼로 섞어주어야, 시멘트가 굳은 걸 풀어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시멘트가 부어져 있는 통에 한쪽 다리는 올리고, 휘퍼의 양쪽 손을 단단히 잡은 후, 천천히 윙- 윙- 위잉- 하면서 하나 둘, 셋 이렇게 속으로 외우다가, 위이이이잉- 하고 긴 소음으로 휘퍼를 돌리는 법을 배우면서, 나는 순간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잘못하면 내가 돌아갈 수도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