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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순복 Nov 25. 2021

다시 쓰는 마음 17

걸으면서 생각한 것들.

숙제로 자기소개서와 더불어, 걷기에 관한 미션을 받았다.


걷기라기보다는 산책인데, 원래도 걷는 걸 좋아하는 까닭에 하루에 한 시간씩 걷기를 숙제로 내주시다니.. 너무 감사합니다..라고 생각했더랬다.     


걸으면 뒤꿈치가 자극이 되고, 그러면서 감성을 자극하는 부분도 함께 높아진다고 하신 것 같은 기억이 나지만, 정확한 것도 아니고, 나는 다만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부류다.     


머리가 복잡하고, 가슴이 답답하고, 우울이 파도처럼 밀려와서, 좀처럼 떠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의 마음속을 떠돌고 다니는 게 느껴지면, 나는 집까지 좀 멀리 돌아서 가고는 한다.     

그게 얼마가 되었든 간에, 루트를 떠올리고, 최대한 집에 도달할 때 까지는 이 우울한 마음을 집안으로 가지고 들어가지 말자고 다짐한 바 있다.     


오랜 버릇 중에 하나인데, 서비스 직에 오래 있다 보니, 일터에서 받았던 스트레스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힘듦이 동시에 오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럴 때 절대로 집안으로 바깥에서 받았던 기분 나쁘고,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들어가지 말자였다.     


집은 나에게 신성한 존재다.


쉬어야 할 곳이고, 오로지 내 두 발을 편안하게 뻗을 수 있는 안전한 곳이 바로 집이라는 존재다.     

비록 내 것은 아닌 집이지만, 집이라는 공간 안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만큼, 나는 세상에서 가장 위로받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안다.     


작고, 허점 투성이고, 허술하기도 하고, 텔레비전에 나오는 의리 유리하게 넓은 것도 아니고, 그들이 사는 곳의 100분의 1 쯤 하는 19평짜리 우리 집이 나에게는 1900평짜리 대지를 가진 대저택만큼이나 안전하고 다정한 공간이 되어준다.     


그보다 작은, 나의 방은 내가 누었을 때 가장 나를 포근히 안아주어야 하기도 하고.     

그런 신성하고 따듯한 공간에 내가 밖에서 피칠갑을 한 마음을 가지고 들어온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밖에서 받은 각종 사건과 사고들로 다치고 아프고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내 마음이 집안으로 오는 순간, 그건 가족들에게 독이 되어 날아가고, 좋지 못한, 소리를 할게 불 보듯 뻔하니까.     


나는 그래서 좀 오래 돌아서 걷는다.


천천히, 귀에는 이어폰을 끼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뺐다가를 반복하고, 가는 길 곳곳에 숨어 있는 맛집을 체크하기도 하고, 화원들에 있는 나무와 꽃들을 보기도 하고, 따듯해 보이는 불빛이 나오는 카페를 힐끔 쳐다보기도 한다. ( 이건 머릿속에 각인)     


그리고 생각한다.


내가 상처 받을 정도의 일인가? 내가 이걸 가지고 오래도록 생각할 문제인가? 혹은 내가 죽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인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인가? 우울이 얼마나 갈지도 모르는 데, 지쳐서 주저앉아 아무것도 안 할 생각인가?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고 오다 보면, 어느새 머릿속에 하얘진다.

아무런 생각이 없어진다는 이야기다.     

아무 생각이 없어진 곳에, 다른 생각이 들어온다.


그건 글쓰기에 관한 생각이다.     

그래, 이 주인공에겐 내가 좀 미안해. 라든가, 나 같은 작가를 만나서 내 캐릭터들이 고생이 많다라든가, 또는 아예 다른 이야기를 생각하기도 한다.     


집에서 얼른 써야겠다...라는 생각이 들면, 발걸음이 조금 빨라지고, 숨이 찬다.

어느새 이마에는 땀이 맺히고, 귀에서 잊혔던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나온다.     

이내 흥얼거리기 시작하고, 집 앞에 서면, 이어폰을 끄고, 키로 문을 열고, 현관 앞에서 번호를 누른다.     

띠- 띠- 띠- 띠.     


집이다.

질끈 묶었던 신발 끈을 풀고, 집안으로 들어간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고, 함께 사온 땅콩 프레첼을 집어 든다.     

오늘 하루도,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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