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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순복 Nov 26. 2021

다시 쓰는 마음 18

밤 조림과 나

서점에서 차를 드시고 가실 때, 계절에 맞는 티 푸드를 하나씩 내어드리는데, 가을부터 밤 조림을 시작했더랬다.


공주 햇밤을 주문해서 손으로 하나씩, 외피만 벗기고, 내피는 상처가 나지 그대로 보존을 한다.  한 알 한 알 밤을 까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는 한다.          


갈색의 밤을 한알 한 알 까면서, 물에 불려진 밤 조각들이 손에서 떨어져 나갈 때마다, 내 손도 같이 물에 불어버리고는 하지만, 복잡한 생각들을 차분히 정리를 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하루는 어떤 날은 슈톨렌을 만들고, 어떤 날은 호두강정을 만들고, 또 어떤 날은 밤 조림을 만들면서 시작을 하는 데, 근래에는 밤 조림을 포장 판매를 하기로 하면서, 밤을 까는 일이 늘어나서, 명상 아닌 명상과 함께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들을 보내는 중이다.     


밤 하나를 깔 때면, 과거를 떠올리기도 하고, 현재와 미래의 고민들 사이에서 갈팡 질 팡하는 내 모습을 보기도 하는데, 그러다가 문득 오른손 검지 손가락을 보면, 어느새 물집이 잡혀 있다.     


역시 정신이 괴로운 것보다는 신체가 고생하는 게 더 낫다는 결론이 내려지는 순간이다.     


아침부터 시작한 일은 어느새 오후가 되었다.

햇살이 서점 안까지 들어오면서야 그제야 의자에 엉덩이를 앉힐 수가 있는데, 어느새 검지 손가락 아래가 빨깧다.     

그럼에도 밤을 까는 일이 즐거운 건, 새벽에 내내 나를 따라다녔던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서 인 것 같다.     

새벽에 나와 타인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했다.

아니 생각이 났다.     

나의 주변에 있는 타인들은 거의 모두가 나와는 상관없는 모르는 사람들이 대다수인데 지인이나 친구라고 불렀던 것 들 중의 거의 대부분이 나를 떠나기도 했고, 내가 떠날 것을 다짐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새벽에는 내가 떠나보낸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이 났다.


혹시나 자신만의 벽이나 기준이 너무 세서 그들을 내가 잘못 판단 내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이제 다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 내 모습을 그려보니, 사람을 보는 방식을 조금 다르게 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다시 쉽사리 나로 돌아올 테였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분명히 교육원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나와 단편적인 관계를 맺거나 혹은 동료로 깊은 관계가 되고 둘 중 하나일 테지만, 아직은 결론을 못 내리겠다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     


밤을 까면서 그런 결론을 내린다는 게 웃기기도 하지만, 밤을 까는 일이 어쩌면 걷는 일만큼이나 나를 멀리서 바라보게 해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부터 영하라고 하던데, 날씨가 더 추워지기 전에 어서 빨리 밤 조림을 가득가득 만들어서 냉장고에 채워 넣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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