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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순복 Nov 28. 2021

다시 쓰는 마음 21

한숨

고3 때인가? 당시에는 친했던 친구가 한 명 있다. 

지금은 늘 그렇듯, 건너 건너 소식을 듣고 있고, 연락은 하지 않는 사이가 된 친구인데, 그 친구에게는 버릇이 하나 있었다.     

한숨을 아주 깊게 내뱉는 거였는데, 나는 왠지 그 한숨이 싫었다.

그 아이의 한숨을 옆에서 듣고 있노라면, 그 아이의 슬픔이 나에게 전해져서, 나마저도 왠지 슬퍼지는 게 싫었다고 하는 게 맞을 거였는데, 고등학교 때 나는 때때로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었다.     

아마 여유라는 게 없어서, 친구의 한숨마저도 나에게 고통스러웠던 날들이었을 거다.     

미래에 대한 계획은 있지만, 당연히 이루어질 리 없는 계획이었고, 그걸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스스로의 아픔에 대해서 전혀 관심 없는 척하면서 나를 외면하고 나를 방치하고 나를 스스로 어떤 우리 안에 가뒀었다.     

당연히 공부가 잘될 리 없었는데, 억지로 독서실을 꾸역꾸역 다니고, 남들처럼 보이기 위해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다녔다.     


하지만 내 팔목에 그어진 작은 실점 같은 상처들이 나는 아프다고 말하고 있었다.

친구의 한숨엔 내 팔목의 상처도 함께 쓸려 와서 많이 아프고는 했었다.

그래서 친구의 한숨이 싫었다.

핑계를 대고 싶은 거였는 데, 나는 그냥 친구의 한숨이 싫었다고, 친구에게 말했었다.     

진부한 클리셰처럼, 가족과의 사이가 좋지 못한,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버지와의 사이가 나쁜 나는 아버지의 폭력이, 그 말도 안 되는 언행이, 우김이, 지긋지긋했고, 독서실과 야간 자율학습이 있는 학교가 아마도 도피처였던 것 같다.     

그러나 피한다고 해서 피해지지는 않았다.

조금만 더 살면 괜찮아진다고 스스로 계속돼내었지만 아마 당시의 나는 괜찮아지지 않을 거라는 당연한 사실을 알면서도 그럴 거라는 헛된 희망이라도 품고 싶었던 거겠지.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를 본다면 다른 말을 해 줄 수 있을 텐데,

지금의 내가 아는 걸 그때의 나도 알았더라면, 좀 더 나은 고등학교 시절을 만들었을 테고, 

누군가가 내뱉는 한숨에 의연하고 여유롭게 안아 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문득 들었다.     

나의 슬픔이 다른 이의 슬픔보다 나은 건 아니고, 다른 이의 슬픔이 나의 슬픔보다 크지는 않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그럼에도 어렸던 시절의 나는 이제 몸만 조금 더 큰 어른이 되었다.

어른인 척하고 있지만, 가끔가다 한숨을 내는 그런 어른이.     


요즘에 한숨을 자주 쉰다.

친구의 그 깊은 한숨만큼은 아닌데, 작은 숨을 그보다 더 작게 내쉰다.

남들에게는 들리지도 않는 한숨을 뱉고 나면,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혹시나 그 한숨을 누가 들었을 까 봐.     

혹시나 듣고는 나를 그때의 눈으로 보고 있지는 않나? 하고.     

그렇다면, 아마 지금의 나는 그때의 눈을 한 그를 안아 줄 수 있을 것 같다.

괜찮다고 말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시간이 흐르고, 한숨을 쉬는 내가 되었는데, 그보다 더 따듯하고 다정하게 한숨을 안아 줄 수 있는 내가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그러니 당신도 가끔은 한숨을 쉬는 것도 괜찮다고.      

그건 슬픔의 소리가 아니라, 당신의 슬픔이 대신해서 숨을 내쉬고 있는 거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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