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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지 Feb 24. 2022

가까운듯 먼 그대여

그건 우리 아빠


나는 엄마 손에 컸다. 다시 말해 엄마 손에서만 컸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이혼가정에서 엄마가 홀로 나와 오빠를 키웠다.

엄마와 아빠는 4학년 때 이혼을 하셨다. 아빠의 바람 때문이었다.

아빠가 없이 컸지만 난 그 어떤 이들보다 부족함 없이 컸다. 아빠의 역할까지 해내는 엄마 덕분이며, 엄마가 힘들 때면 오빠가, 오빠가 힘들 때면 큰 이모부가 큰 이모가 나의 아빠가 되어주었고, 그들의 사랑 덕분에 난 건강한 어른으로 자랐다.


그렇다고 지금 아빠와 연을 끊고 사는 것은 절대 아니다. 아빠는 우리에게 계속적인 경제적인 지원은 물론, 일 년에 3-4번 얼굴을 보며 맛있는 것을 먹으며 특별한 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기도 한다. 밥을 먹지 않았다면 약간의 걱정을 해주는, 딱 그 정도의 관계를 유지하는 아빠와 딸의 관계다.


엄마와 아빠가 이혼한 뒤로 우리 집은 이혼에 관해 3년 동안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어린 나에게는 이혼이 마치 금기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크니 엄마와는 이혼에 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 금기어는 깨졌고 이제는 엄마랑 내가 많이 하는 대화 중 하나의 소재가 되었다.


하지만 아빠와는 달랐다. 시간이 지나도 어물쩍 어물쩍 이야기가 나올 듯하면 스리슬쩍 다른 이야기로 넘기며 어색한 순간을 피해만 갔다.


그러던 아빠와, 2022년. 1년 만에 만난 아빠와 처음으로 이야기를 했다.


아빠 우리 이제 아메리칸 식으로 다 까놓고 이야기 좀 해보자

라는 나의 말을 시작으로, 맛있는 소고기를 배불리 먹고, 소고기 집 사장님이 취미 삼아 만든 식물원 같은 카페에 들어가 좋은 공기를 마시며 말이다.


아빠도 아빠 나름대로의 입장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아빠의 입장일 뿐, 어떤 것에도 이유가 용서가 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빠 인생에는 여자가 단 두 명뿐이라고 한다.

우리 엄마 그리고 지금 그 여자.

놀기 좋아하는 아빠는 27살에  엄마와 결혼을 했고 오빠와 나까지 낳아 하나의 가정을 꾸렸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13살 11살이 되던 해에 그 가정을 떠났다.


아빠는 후회한다고 했다.

지금 그 여자와 사는 것처럼 엄마랑 살지  못한 것을.

“지금처럼 그때 살았더라면 더 잘 살았을 텐데…”라며 말이다.

엄마와의 결혼 생활 때는 매일 놀기 바빠 가족다운 가족의 삶을 살지 못했다고. 그리고 그 여자를 만났고  그 여자에게는 정말 그 누구보다도 잘하고 산다고.


나는 가끔 아빠를 만나면 비혼선혼을 하곤 했다.

그럼 아빠는 물어봤다.

“도대체 왜?’

그럼 난 대답했다.

“아빠 같은 사람 만날까 봐”

사실 비혼주의자도 아니면서 아빠가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느꼈으면 하는 마음에서, 소심한 복수를 했던 것이다.


지금은 그 여자에게 그 누구보다 잘하고 산다는 말을 하는 아빠는 아마도 세상에는 아빠 같은 남자 말고도 잘하고 사는 사람도 많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 것이다.

딸이 자기 때문에 결혼을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게 마음에 걸려서, 지금 잘하고 사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 것이다.


하지만, 아빠 인생에 단 두 명 있는 여자 중 현재 아빠가 그 누구보다도 잘하고 사는 것은 그 여자다. 엄마와 함께 살면서 그렇게 살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지금은 그 누구보다도 잘하고 있다.

난 이 말을 꺼낸 아빠가 너무도 미웠다. 마음이 미어졌다. 왜 그 깨달음을 우리 엄마에게 상처를 주며 깨달았으며, 그 깨달음에 대한 실천을 다른 여자에게 실천하고 있는 걸까?

왜 상처 준 사람은 지금의 삶을 풍족하게 살며, 상처받은 사람은 상처받은 마음을 가지며 마음 한편 외로움을 품고 살아야 하는 걸까?


난 아빠의 말이 너무도 슬펐다. 마음이 너무도 아파 눈물이 났다. 비수가 꽂히는 느낌이었고, 만약 이 말을 엄마가 들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에 더 눈물이 났다.

그리고 내가 우는 이유에 대해 아빠에게 정확하게 이야기했다.

나는 왜 내가 크는 동안 우리 옆에 있지 않았냐고 어린 마음에 우는 것이 아니라고. 나이가 들수록 여자인 엄마의 입장이 더 이해가 가는 나로서, 엄마에게 상처를 준 아빠가 너무도 미워서 우는 것이라고. 나는 아빠가 평생 나와 오빠가 아닌 엄마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길 바란다고.



엄마는 아빠를 말할 때 항상 ‘그래도 사람은 좋은 사람이야’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래도 자식들이 아빠를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매번 엄마는 그렇게 이야기해주셨다. 하지만 그날 아빠가 말하는 엄마는 ‘엄마는 강한 사람이야’로 표현되었다.

엄마는 그래도 우리에게 아빠의 좋은 면만을 생각하게 해주려 했다. 하지만 아빠 기억에 엄마는 그냥 강한 여자였나 보다.


아빠도 안다. 자신의 잘못을.

하지만 아빠는 모른다. 엄마의 상처를. 엄마의 아픔을. 엄마의 배신감을. 엄마의 외로움을.


책임지질 못할 가정을 이룰 것 같았으면, 20대의 어여쁜 엄마를 그냥 놓아줄 것을. 그럼 지금의 엄마는 더 예쁜 모습으로 웃고 있을 것을.


엄마는 강한 사람이다. 맞다. 강했기에 이혼한 후에도 자식들을 이렇게 건강하게 잘 키웠냈다.

하지만 아빠가 말하는 그 강함, 억센 여자는 아니다. 설령 그랬더라도 20대 후반의 엄마를 그렇게 만든 것은 아빠였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아빠가 밉다. 근데 아빠라는 이유로 완전히 미워할 수 없는 나도 밉다.


생각해보면 엄마보다 내가 더 아빠를 원망하고 있는 것 같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계속해서 곱씹으며 원망하고 미워하면 무엇하나. 결국 원망이란 감정은 내가 놓아주어야만 자유로워질 수 있는 감정인데.

난 언제쯤 아빠에 대한 원망을 완전히 놓아줄 수 있을까?

난 언제쯤 아빠가 엄마에게 한 짓을 완전히 용서해줄 수 있을까?

더 솔직해져서 내가 용서하고자 하는 것이 저뿐일까?


난 여전히 아빠가 밉다.

밉고 밉고 또 미운데.. 애틋하다.


그런데 어쩌면 난 그날의 눈물을 통해 이런 말까지 전하고 싶었는 건지도 모른다.

왜 오빠와 나를 선택하지 않았냐고,

왜 온전한 내편인 가족이 되어주지 않았냐고,

왜 내게 결핍을 남겨주었냐고,

왜 사람들이 나를 이혼가정의 아이라는 이유만으로, 걱정이란 명목 아래 동정이란 눈빛을 받으며 자라게 했냐고,

왜 나는 아빠의 생일, 혈액형, 이름, 나이밖에 모르는 딸로 만들었냐고,

왜 아빠는 내 아빠인데 내 아빠 같지 않냐고,

왜 내가 크는 그 모든 순간에 함께 하지 않았냐고,

이 모든 걸 말하고 싶었지만 애써 말하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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