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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지 Oct 24. 2022

아빠라는 결핍

이쁜아라 불러주세요.


잘 준비를 마치고 어느 때와 같이 유튜브를 틀며 침대에 누웠다. 짧아 보기 편한 유튜브 쇼츠에 빠진 요즘 “아빠 닮아서 못생겼다는…”이라는 쇼츠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영상은 오빠에게 유전자가 몰빵 되어 성형을 하고 싶어 하는 딸과 그것을 말리는 아빠가 담겨있었다. 딸은 아빠 닮아 못생긴 자신을 못난이라며 아빠에게 짜증을 내며 성형을 하겠다고 화를 냈다. 아빠는 그런 딸을 보며 “이쁜아 아빠는 세상 사람들이 다 너 못생겼다고 그렇게 애기해도 아빠한테는 네가 제일 예쁜 딸이야”라며 설득을 한다. 그런 아빠에게 화가 난 딸은 “아빠한테만 예쁘면 뭐해 사람들은 몰라주는데, 사람들이 나 정말 못생겼다고 그런다고. 진짜 짜증나”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아빠는 씩씩거리며 걸어가는 딸의 뒷모습을 보며 “이쁜아!”라며 외치며 영상은 끝난다.

한참을 울었다. 20초밖에 되지 않는 영상을 보고 침대에서 콧물 눈물 다 빼여 끄억끄억 울었다. 누가 보면 세상이 무너졌는지 알았겠지만 다행히 혼자였다.

20초 만에 내 결핍을 확인했다. 아빠의 사랑.


영상 속 딸이 부러웠다. 무조건적이 사랑을 주는 아빠가 있다는 사실이 부러웠다. 가슴에 못을 박는 말을 하고 일어서는 딸에게 끝까지 이쁜이라고 불러주는 아빠가 있다는 사실이 부러웠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못생겼다고 해도 내가 제일 예쁘다고 해주는 아빠가 있다는 게 너무 부러웠다.


나에게도 아빠는 있다. 하지만 잘 알지 못한다. 가족보다는 멀고 남보다는 아주 조금 가까운 사이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만 같이 살았고, 같이 사는 동안 함께한 추억은 손에 꼽는다. 성인이 돼서는 일 년에 세 번 보는 정도다.


대학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내 결핍을 알지 못했다. 아빠 없이도 나는 너무 잘 자랐기에, 아빠 없는 삶이 부족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엄마와 오빠면 충분했다. 그러다 어느 날 내 안에 있는 결핍의 존재를 인지하게 되었다. 성인이 돼서 마시는 술 덕분이었다.

막 성인이 되었을 때, 나는 술만 마시면 아빠 이야기를 하며 엉엉 울었다. “아빠를 원망한다. 아빠가 밉다…”와 같은 말을 하며 울었다. 눈이 탱탱 부어 일어난 다음날 이런 나 자신에 놀랐다. 나는 괜찮은 게 아녔구나. 그제야 생각해보니 항상 괜찮았던 것은 아니었다. 아무도 나를 위축시키지는 않았지만 아빠 이야기가 나오면 위축이 되었다. 무용 공연 날 딸을 보러 온 다른 친구들의 아빠를 보며 내 아빠를 생각하기도 했다. 기숙사에서 다정하게 아빠와 통화하는 친구들 보며 아무렇지 않게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렇지 않지 않았다.

나는 나의 결핍의 존재를 알아차렸지만 꾹꾹 접어 내 마음 저편에 눌러 담았다. 잘 눌러 담았다고 생각하며 일상을 지냈지만 생각보다 큰 결핍은 자주자주 삐져나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당황하지 않고 다시 잘 접어 꾹꾹 내 마음 저편으로 미뤄뒀다.


결핍은 언제 가는 다른 문제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문제가 크고 작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문제로  존재를 계속해서 뽐낸다.  아빠의 사랑이라는 결핍이 나에게 다른 문제로 나타날까 무서웠다. 예전에 어떤 기사에서 어렸을  아빠의 사랑을 충분히 받은 여성이 자신을 중심으로  건강한 연애를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 결과를  적이 있었다. 아빠의 사랑이라고는   번도 느껴본  없는 내가 건강하지 못한 연애를 할까 두려웠다. 이러한 결핍 때문에 남자 친구에게 아빠가 채우지 못한 언가를 요구하는 못난 사람이 될까  항상 조심했다. 그렇기 때문에 결핍을 인정할  없었다.


하지만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결핍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모르는척해도 내 안에 있는 결핍은 내 일부였다.  나이가 들수록 결핍은 자기 존재를 더 강하게 어필했고, 20초 채 되지 않는 영상 하나로 20분을 울게 하는 힘을 가졌다.

솔직히 이 결핍은 평생 나와 함께할 것이다. 지나가버린 시간에서 생긴 결핍이라 아무리 지금에서야 아빠가 나에게 아빠다운 아빠가 되어준다고 한들 그때의 결핍이 채워지길 만무하다. 그렇다면 난 이 결핍에 익숙해져야 할 텐데.. 그게 참 어렵다. 이쁜아라 외치는 남의 아빠의 말에 눈물을 흘리는 내가 아직도 낯설고, 감성 터지는 저녁에 사무치게 밀려오는 아빠에 대한 원망을 감당하기도 버겁다. 결핍과 친해지는 방법을 찾아가는 중인 걸까…?



여하튼 어젯밤 영상을 보고 난 후에 확실한 것은.

나에게도 나를 이쁜이라 불러주는 다정한 아빠가 있었더라면 참 좋았겠다 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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