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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기쁨 Oct 11. 2019

어린 아빠를 만났다.

제주도에서의 긴 시간. 


제주에 도착한 우리는 렌트했던 자동차를 찾으러 갔다. 번호표를 받고 차를 기다리는 동안, 아빠는 새삼 내가 운전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며 내 나이를 재차 물었다. 그러곤 코딱지만 했던 것이 이렇게 컸냐며 시간이 빠르다고 말했다. 그런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다, 우리 차례가 왔고 자동차를 건네 받은 우리는 신이 나서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렇게 시작한 여행의 첫날, 아빠가 그렇게 원했던 해안도로를 달렸다. 아빠의 고향은 강원도, 묵호다. 아빠는 바다를 보고 자라서 그런지, 여름만 되면, 강릉에 놀러 가자고 그렇게 얘기를 한다. 눈 앞에 보이는 제주 바다를 보며 아빠는 아빠의 어린 시절로 돌아갔고, 어렸던 시절의 아빠를 회상하며 나에게 '어린 아빠'의 모습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렇게 삼십 분을 떠들며 운전을 하다 나는 예쁜 바다 앞 길을 발견했고, "주차하고 조금만 보다 가자!"라는 말에 아빠는 주차할 수 있는 곳에다 주저 없이 차를 새웠다.



바다 앞 길,

"아빠의 훈련 실력을 발휘할 때야."라는 말과 함께 아빠에게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멋진 사진 찍어줘!"라는 내 말에, 아빠는 "그럼"하며 사진을 찍었지만 " 멋진 사진"이 아닌 "웃긴 사진"을 찍어 보이며, 이 정도면 멋지지 않냐라는 말과 함께 나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짜리 몽땅한 숏다리로 만들어놓은 사진을 보고 한참을 웃고, 차로 돌아와 우리는 다시 여정을 시작했다. 


차로 운전을 하면서 넓고 푸른 바다와, 따스한 햇빛과, 제주도 사람의 온정과, 맛있는 해산물의 향과, 세차게 돌아가는 풍차를 보았고, 어렸고 순수했던 아빠를 만났다. 익숙하지 않은 풍경 덕에, 아빠는 새삼 감성적인 사람으로 변했고, 이런 곳에 나와 함께 있음을 고마워했다.




"딸 덕분에 이런 곳에서, 이런 것을 보네." 괜히 뭉클했던 순간이었다.






그렇게 달려 도착한, 협재 해변. 생각했던 것보다 날씨가 더 추웠지만 햇빛 덕분에 견딜만했다. 물이 빠질 때라 차를 주차를 하고 바다 쪽으로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했다. 협재해변에는 약간은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을 볼 수가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들리던 "엄마", "아빠" 소리- 가족여행을 온 사람들도 있었고, 그때 기억나? 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옛-추억을 나누고 있는 친구들도 있었다. 먼저 걸어가시는 할아버지를 따라 걷고 계시는 할머니와, 손녀로 보이는 꼬마 아이도 보였다. 그런 풍경을 보니 나도 아빠와 바다를 따라 걷고 싶은 생각이 들어, 아빠 손을 꼭 잡고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걷기 시작했다.


"좋다-" 라는 말 외엔 큰 말이 필요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아빠는 엄마와 신혼여행 때 온 이후로 처음온 제주라며, 엄마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핸드폰으로 그렇게 서로 대화를 하고 하루지만 콧바람 제대로 쐬고 오라며 엄마의 말을 듣곤 대화를 마무리했다. 전화를 끊은 후 아빠는 협재를 엄마 아빠만의 장소로 놔둔다며 나와 사진을 찍지 않으려고 했지만, 내가 땡깡을 부린 덕에, 아빠와 함께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현재의 아빠와 나의 모습을 제주도에 남길 수 있음에 감사하며, 해가 지기 전에 유채꽃 밭으로 향했다. 

56년 중 제주에서 딸과 함께. 28년 중 제주에서 아빠와 함께.







제주도의 왼쪽으로 도는 여행이라, 우리는 곧 장 산방산이 있는 곳으로 갔다. 유채꽃을 보기 위해서다. 가는 길에 해는 조금씩 지고 있었다. 노을 시간에 맞춰 도착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내심 불안감이 생겼지만, 다행히 딱 노을 시간에 맞춰 유채꽃을 볼 수 있었다. 

유채꽃 사이로 발걸음을 옮기는 아빠의 모습이 괜히 멋있고 듬직했다.아빠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서, 아빠를 모델 삼고 이런저런 포즈 요청을 했다. 부끄러워하면서 내 요청을 다 들어주는 아빠. 그리곤 마지막으로 예쁘게 웃는 사진을 남기고 싶었다. "웃어봐!" 라는 말에 할아버지같이 웃는 아빠의 얼굴을 보며, 내가 웃음이 터져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웃는 나를 보며 다시 웃는 아빠의 웃음을 나는 담았다. 진짜 웃음이었다. 

아빠의 진짜 웃음.




사진을 다 찍은 후 차를 다시 타고 숙소로 향했다. 제법 어둑어둑해졌고, 그로 인해 달이 정말 선명하게 보였다.

그 달을 보며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을 틀었고, 아빠와 나는 음악을 들으며 아무 말 없이 가기 시작했다. 

음악이 끝날 때쯤 나는 대뜸 아빠에게 "아빠! 다음에 또 오자!"라고 말했다."그래, 또 오자!"라는 말로 화답하는 아빠.


나는 제주도가 아니더라도, 내가 조금이라도 더 크기 전에 아빠와, 그리고 엄마와의 시간을 더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 "하루"라는 시간이 생각보다 긴 시간이라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하루뿐인 시간이지만, 이렇게 온전히 24시간을 함께 할 수 있어서 더욱 마음이 따듯했던 그런 순간이었다. 






아빠는 제주도에서 엄마와 함께했던 신혼여행을 그렸다. 그리고 이제는 그 그림에 "딸"을 추가했다. 

다음에는 동생과도 함께 한 "가족"을 그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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