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염광섭 Dec 19. 2018

시작

90일간의 세계일주 #1

18년 12월 14일 10:32 AM


   러시아인들은 정말 키가 크네요. 솟아있는 빌딩 숲 사이에 버젓이 서있는 동네 슈퍼가 된 기분이에요. 꿋꿋하게 체크인을 하고 점심으로 불고기덮밥을 먹었어요. 출국까지는 아직 2시간 정도 남아있습니다. 배도 불렀겠다 할 일을 해야죠. 인천공항 3층에 있는 약국으로 갔어요. 3개월 간의 여행에 필요한 상비약을 사러요. 지사제 부터해서 고산병 약까지 전부 구매했더니 그 가격이 무려 15만 원이나 되더라고요. 그러곤 1층으로 가서 사전에 구매해놓은 유심칩을 수령했어요. 속도는 3G밖에 안되지만, 전 세계에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느리다지만, 일일이 나라를 바꿀 때마다 굳이 유심을 교체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그러려니 했어요.

와. 그나저나 가방 진짜 무겁네요. 군장 같아요. 17kg이 넘어요.

이제 탑승수속을 밟으러 갈 거예요.




18년 12월 14일 4:26 PM


   지금은 모스크바를 경유해서 히드로 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이에요. 다행히도 옆자리가 비어있네요. 빈 옆자리는 제 것입니다. 패딩이며 가방이며 옆자리에 다 쑤셔 넣고 아주 편하게 가고 있습니다. 이제 7시간만 더 가면 되네요. 출발한 지 2시간이나 지났어요. 전날 밤을 새워서 그런지 매우 피곤합니다. 한숨 자야겠어요. 옆자리도 비었겠다, 조금 눈꼴이 사나워 보이겠지만 새우 같이 누워서 자렵니다.




18년 12월 14일 8:31 PM

   런던은 우리나라보다 표준시간이 늦기에, 런던행 비행은 해를 쫓아가요.

덕분에 창문을 통해 본 세상은 낮도 밤도 아닌 시간이 계속됩니다. 세계의 윤곽이 희미해지는 그런 시간이요. 황혼기라고 하죠. 지상에선 짧디 짧은 이 황혼기를, 런던행 비행기에선 몇 시간 넘게 감상할 수 있는 거예요. 이도 저도 아닌 바깥의 풍경에 제 심정의 갈피도 못 잡겠네요.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의 틈에서, 시간을 거스르는 이 비행은 잠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느낌마저 들게해요.


   세계일주라는 게 참 막막하면서도 단순합니다. 옷도 생필품도 한아름 가져가야만 할 것 같았는데, 아니래요. 있는 대로 다 빼고, 정말 필요한 것들만 챙겨야 한다네요. 나머지는 현지에서 구입해야 한답니다. 잠깐 들리는 이방인이 아닌, 그곳에 사는 사람으로서 하는 여행인 셈이네요.

그래서인지 배낭은 생각보다 가볍습니다. 여름옷 몇 벌, 겨울 옷 몇 벌, 생필품 몇 개.

그런데 마음이 무겁네요.

잘 해낼까? 소매치기당하면 어쩌지? 재미없으면 어쩌지?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까?


계획한 1년 3개월의 여정은 이제 불과 3개월밖에 남지 않았어요. 그렇게 기다리던 날인데, 무슨 감정인지 마냥 행복하진 않습니다. 걱정이 앞서는 것 같아요.


3달 뒤엔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까요?



18년 12월 14일 11:27 PM

   런던은 이제 밤 11시 30분이에요. 받은 유심칩을 꼽으니, 제 휴대폰 시계도 이제 런던 시각에 맞춰졌네요.

계획은 빈틈이 없어요.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것이란 마음까지 추가하니,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해졌죠.



하지만 왜인지 저도 제 자신을 장담할 수 없는,

그런 여행이 될 것 같아요.


다녀와봐야 알겠죠.


다녀올게요.


이전 10화 면접관도 공부를 합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