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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어 Nov 22. 2022

‘나만의 시간’이란 무엇인가?

책 <지금은 나만의 시간입니다>에 나온 질문에 답하기-1

우선 나는 ‘나만의 시간’이라는 게 성립되려면, 그 전제가 ‘바쁘게 사는 삶’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진짜 바쁠 땐 막상 그럴 만한 여유가 전혀 없었던 것 같다. 퇴근하고 집에 가면 어떤 시간을 보낸다고 할 것도 없이 바로 잠을 자버리거나 예능 프로를 보며 뭐든지 깊게 생각 안 해버리거나 하는 등 ‘회피의 시간’을 보냈었다.


한 편으로 ‘나만의 시간’이라는 건 내가 처한 상황이나 타인에 대한 생각 등을 지우고 온전히 나에게 '몰입'할 수 있는 시간 같다. 하루 종일 밖에 있다가 새벽에 혼자 이것저것 하며 시간을 보냈을 때, 퇴근하고 댄스학원에서 1시간 동안 춤을 췄을 때, 연기 연습을 하기 위해 연습실에 갔을 때 그런 감정을 느꼈다. 그렇다면 결국에 어디서 무얼 하든 내가 '몰입'할 수 있다면 그게 나만의 시간이 되는 건 아닐까.


사실 나는 또 한 편으로는 ‘시간’이라는 것에서 타인(물건이 될 수도 있음)을 완전히 배제한다는 게 말이 되나 싶다. 삶은 모순적이기 때문에 내가 나 자신과의 관계가 엉망일 때 타인과의 관계도 엉망이 된다는 계산은 반대로도 통한다. 타인과의 관계가 엉망일 때 나 자신과의 관계도 정상이기는 어렵다. 그저 삶은 때로는 나 혼자 때로는 다른 사람과 함께, 이렇게 서로 번갈아 힘을 빌리는 차원은 아닐까. 우리는 공부를 할 때도 혼자 한다고 생각하지만 인터넷 강의를 듣는 것도, 다른 사람들이 공부하고 있는 공간에 가서 공부하는 것도, 결국엔 무언가에 기대고 싶은 마음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혼자’를 강조하는 자기계발서들‘개인의 힘’을 지나치게 맹신한다는 문제가 있다.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독방에서 살았던 사람이 아니고서야, 우리는 혼자서 살 수 없다. 우리 삶은 1인극이 아니다. 다만, 나를 향한 타인의 무분별한 평가들 속에서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의 중심을 잡기 위한 ‘나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동의한다.


나는 여기서 ‘믿음’과 ‘신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단어를 쓸 때 그 뜻을 알고 쓴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사전에 검색해 보면 그 뜻이 다를 때가 분명 있을 것이다. 방금 찾아봤는데, 믿음이란 어떤 사실이나 사람을 믿는 마음.’이고, 신뢰는 굳게 믿고 의지함.’이라고 한다. 어릴 때는 몰랐는데, ‘삶의 안정성이라는 것들은 대부분 이 두 가지 단어를 주변으로 공전하고 있었다. ‘사람은 믿을 게 못 된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라는 시니컬한 세상의 소리들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평생을 믿고 신뢰할 만한 것들을 찾아 헤맨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얻었다가도 잃어버리고, 되찾았다가도 영영 잃어버리고, 대체품을 얻었다가 또 잃어버기를 반복한다.


인간에게 ‘상실’만큼 가장 큰 고통이 없는 이유는, ‘삶에 대한 믿음’을 산산조각내기 때문이 아닐까. 삶의 원동력이 되는 믿음들, 영원할 거라고 믿었던 것들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나만의 시간’이 존재해야 할 당위성은 여기에 있다. 크고 작게 무너진 무너지고 있는, ‘삶에 대한 믿음’과 ‘어떤 사람(나를 포함)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함이다.


앞서 서론에서 말했던 내가 ‘나만의 시간’이라고 느꼈던 것들(하루종일 밖에 있다가 새벽에 혼자 시간을 보냈을 때, 퇴근하고 댄스학원에서 1시간 동안 춤을 췄을 때, 연기 연습을 하기 위해 연습실에 갔을 때)도 다 여기에 한다. ‘몰입’이라는 것은 ‘자기효능감’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나를 '회복'시키고, 내가 할 수 없을 거란 생각했던 것들을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준다. 그리고 이 믿음은 자신감이 되고 궁극에는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려 살 수 있는 힘과 에너지가 된다. 


그렇다면 삶의 모든 것이 처참하게 붕괴되어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경우에 이르렀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만의 시간’이라는 것도 정신승리처럼 느껴지고,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로 인해 혼자 있는 시간이 제일 견딜 수 없이 괴롭고 비참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사람 함께 시간을 보낸다고 해서 나아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이 답을 찾기 위해 이 책을 읽기 시작했고, 결국엔 글쓰기를 다시 시작해버렸다. 이런 걸 보면 결국 삶은 어떠한 좋은 경험을 하든 어떠한 나쁜 경험을 하든, 그건 그거대로 두고서 또 다른 것들을 계속해서 해나가는 ‘의지의 차원’인 걸까.


앞서 내가 사람은 사람 없이 살 수 없다고 얘기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라는 것, '관계'라는 것, '성취'라는 것, '믿음'이라는 것을 모두 포기하지 않으려면 어떠한 경우에도 다시 일어서는 ‘나의 의지’가 중요하. 반복되는 상실이 주는 '삶의 허무함'이라는 깊은 잠에서 몇 번이고 다시 깨어나려고 노력하는 의지 말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나의 의지라는 것도 100% 나만의 것은 절대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내 안에 뿅하고 생기지 않는다. 아주 작더라도 그럴 만한 계기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요즘 나는 내 의지를 살려낼 계기를 찾는 중이다. 나와 남에 대해 무너진 믿음과 신뢰를 회복할 계기를 찾는 중이다. 별 거 아닌 것 같 때로는 엉뚱하고 이상한 것 같은 이 노력들이 쌓이고 쌓여 나를 일으켜 세워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끝으로 내가 삶에 대한 의지를 북돋고자, 그럴 만한 계기를 찾고자, 요즘 혼자 하고 있는 것들을 공유해 보고자 한다.


첫 번째, 사막 같이 메말라버린 내 감수성에 비를 내려주는 예술작품 반복해서 감상하기.

지인의 추천으로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보게 됐는데, 마음이 정말 이상했다. 한 작품을 영화관에서 두 번 이상 본 적 없는 나는, 이번 달에만 이 영화를 총 세 차례 관람했다. 23일에 확장판이 나온 보려고 또 예매했다. 이 영화를 보면 눈물이 나고, 이상하게 삶이 가치 있게 여겨지고, 내가 살아있는 기분이 잠라도 든다. 


두 번째, 책 읽기와 필사를 하면서 새로운 생각을 얻기.

내 안에 더 이상 새로운  없다는 생각이 들면 나는 책을 읽는다. 뭐라도 새로운 생각이 나를 구원해 주길 바라면서. 책 속에서 내 삶을 돌아볼 때면 괴롭기도 하지만, 내게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말들을 수집하다 보 때로 기적처럼 변화의 계기를 찾을 수 있게 된다. 엉망진창인 내 삶에도 더 나은 걸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이 들지만 절대 안 하고 있는 것도 공유한다. 그것은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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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나만의 시간이든 그게 무엇이 됐든 간에 나는 삶에 대한 시니컬함 덜어내고 싶다. 허무주의가 난 정말 싫다. 돌로 살기 싫다~!



더 자주 감탄하고, 덜 방어적이며, 다만 궁금히 여기고, 팔딱팔딱 살아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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