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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어 Jan 26. 2023

'발산하고 비워내기' - 정신과 신체의 해방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메소드

최근에 <마리나의 눈>이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은 행위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성장 배경, 그 작품 세계, 창작 배경 등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을 읽은 이후로 나는 내 안에 가득 찬 것과 그것을 발산하고 비워내는 것 그리고 솔직한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정신과 육체를 작품 전면에 내세워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실험하고, 그 한계를 뛰어넘는 퍼포먼스를 보여줌으로써 관객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세계적인 행위예술가이다. 때로는 작품 속에서 실제 자신의 목숨을 거는 일까지도 마다하지 않마리나. 그녀의 작품들은 관객들이 도저히 외면할 수 없을 만큼 거칠게 펄떡이는 물음표를 던진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 두 가지가 있었는데, 바로 해방 시리즈의 첫 번째 <목소리의 해방(Freeing the Voice)>과 두 번째 <기억 해방(Freeing the Memory)>이다.


 



첫 번째 <목소리의 해방(Freeing the Voice)>(1976)에서 마리나는 등을 대고 누운 뒤 머리를 젖혀 카메라와 관객을 바라보았고, 이어서 목소리가 다할 때까지 비명을 질렀다. 처음에 소리를 내지르면 자신의 목구멍에서 소리가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 강하게 인식되지만, 어떤 한계를 넘고 나면 소리는 몸과 분리되어 그저 소리가 된다. 몸속에서 소리의 에너지를 완전히 꺼내 놓는 것이다.

두 번째 <기억 해방(Freeing the Memory)(1976)은 몸속에서 기억들을 완전히 꺼내려는 시도였다. 그는 카메라 앞에 서서 머릿속에 있는 단어들을 하나씩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했다. 그리고 머릿속에 더는 단어가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지속했다. 마침내 단어가 모두 소진되었을 때, 마리나의 기억들은 공기 중으로 해방되었고, 그의 의식은 기억으로부터 해방되고 과거로부터 정화되었다.


-책 <마리나의 눈> 중에서



이 책을 읽고 난 직후, 내가 지난 2017년에 시작하여 1년 반 가까이 썼던 에세이를 전부 다시 읽어봤다. 이들은 지금은 남들이 볼 수 없는 나의 예전 브런치 계정의 글들이며, 당시 계정을 삭제하기 전 따로 저장해 둔 글들이다. 다시 읽어보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내가 이 정도로 솔직한 사람이었구나.'였다. 과거의 내가 쓴 글들이 너무, 너무 솔직해서 웃음이 났다. 그때는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그렇게 글을 썼던 거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와 다른 이유와 방식으로써 똑같이 힘들고 괴로워도 절대 그렇게 글을 못 쓴다. 지금의 덜 솔직해진 모습을 더 사회성이 있다고 해야 할까, 더 단단해졌다고 해야 할까, 더 건강해졌다고 해야 할까 하면은 셋 다 맞기도 하고 셋 다 아니기도 하다. 놀랍도록 솔직했던 '과거의 나'는 적어도 '지금의 나'보다는 훨씬 더 내면을 잘 비워내는 사람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예전에는 솔직하게 말하고 글을 쓰는 것만큼 쉬운 일이 없었는데 요즘엔 어렵다. 그래서일까. 마리나가 관객들 앞에서 목소리가 더 이상 나지 않을 때까지 소리를 지르고 머릿속에 단어가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단어를 나열하는 퍼포먼스가 주는 인상이 너무 강렬했다. 브런치 작가로서 이곳에 처음 글을 쓸 당시, 나의 글은 일종의 감정쓰레기통이었다.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오롯이 내 감정을 마음껏 발산하고 비워낼 수 있었다. 이후 그러한 글쓰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게 된 것은 나와 내 글 모두 변화하고 발전했으면 하는 욕심에서 비롯되었다. 그렇게 해서 언젠가부터 감정쓰레기통 같은 글은 일기에 적었고, 브런치에 올리는 글은 보다 정제하고 다듬어서 올리게 되었다.


그런데 일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청자가 나밖에 없다는 게 조금 답답하게 느껴졌다. 결국 어느 기점부터 잘 쓰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브런치에다 내 속을 있는 그대로 다 쏟아내고 싶지도 않다 보니 이것 또한 자주 쓰지 않게 되면서 내 안의 것들은 점점 오갈 데 없게 되었다. 정체 모를 것들이 속에 켜켜이 쌓 무시무시한 폭탄이 되어 가 있을 무렵, 책 <마리나의 눈>를 만났다. 책을 읽으면서 어떻게 다시 내 안 비워낼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돌고 돌아 결국엔 글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이야기를 누구에게 하고 싶은가.


나는 행위예술가가 아니기에 내가 지르는 소리나 나열하는 단어를 들어줄 청자가 없다. 그래서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굿리스너였던 실존 인물을 가상의 청자로 정한 뒤 PC 메모장을 폈다. 내가 지금 당장 죽어서 이 글이 유언장이 되지 않는 이상 아무도 보지 않는다는 일종의 전제 하에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나는 모든 말을 적어내려갔다. 1월 9일부터 1월 13일까지는 매일 적었는데 그 글양이 상당했다. 그 이후로는 매일 적지는 않고 하고 싶은 말이 생길 때만 적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 행위는 놀랍게도 내 안을 비워내는 데에 아주 효과적로 작용하고 있다.


그저 가상의 청자를 정했고,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전제했고, 메모장에 의식의 흐름대로 써 내려갔을 뿐이었다. 가상의 청자는 실존 인물이기는 하지만 그 실존 인물에게는 절대 하지 않을 말들과 누가 본다고 하면 절대 털어놓지 않았을 감정과 생각들을 메모장에 가득 채웠다. 그동안 밤에 잠들기 전까지, 잠에 들어서도, 아침에 일어나서도, 하루종일 안개처럼 자욱하기만 할 뿐 그 어디로도 빠져나가지 못했던 내 안의 생각과 감정들. 그것들을 끄집어내서 적나라한 언어로 표현하는 과정을 통해 내면이 정화되는 경험을 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극한으로 다다랐던 예민함이 서서히 깊은 잠에 드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나 자신과 내가 처한 상황을 더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었고,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더욱 실질적으로 생각해  수 있었다. 생각을 정리하는 글 읽기 좋은 글이라면, 나에게 솔직한 글은 내면을 정리하기 좋은 글이었다.





마리나는 일련의 작업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청소하고, 매체로서 자신의 몸에 더욱 집중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과거로부터 시작하여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내면의 에너지를 담는 그릇으로서 신체를 새롭게 발견했다. 그리고 신체의 에너지를 모두 해방해 온전히 비운, 그래서 더욱 매체로서 기능하게 된 신체를 갖게 되었다. 그는 자기 자신과 제대로 눈을 맞춘 후 이제 바깥을 향해 눈을 돌리며 타인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자신을 딛고 일어나 더 넓은 외부 세계로 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이후 파트너 울라이와의 관계 에너지 작업으로 이어지며, 2000년대 이후 최근까지 이어진 작업들과도 긴밀한 연관이 있다.


-책 <마리나의 눈> 중에서



마리나의 해방 시리즈는 목소리와 기억의 해방을 통해 영혼을 해방한 뒤에 <신체 해방(Freeing the Body)>(1976)으로 완성되는데. 목소리와 기억의 해방은 메모장에 글을 적는 것으로 대체하고 있는데, 신체의 해방은 아직 대체활동을 찾지 못했다. 아니 사실 뭔지 아는데 지금은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아서 유보해두고 있다. 바로 운동! 그중에서도 작년 6월에 그만둔 춤 학원을 다시 다니고 싶고, 새로운 운동으로는 클라이밍에 도전해 보고 싶다.




*춤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브런치글

-> 춤을 배우게 된 계기

-> 이후 춤을 1년 동안 배우면서 깨달은




그리고 사실 위에서 언급한 이야기들 말고도 마리나의 작품과 관련해서 하고 싶은 말들이 아직 많다. 아직 생각이 다 정리가 되지 않아서, 정리가 되면 새로운 글로 적을 예정이다. 바로 의 발췌문에서 예고편처럼 언급되어 있듯, 마리나가 전 연인 '울라이'와 함께 한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가 남아 있다. 관계에 대한 깊은 메시지를 전해 준, 마리나와 울라이의 퍼포먼스에 대해서 언젠가(?) 이야기해 보겠다. Coming s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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