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지 멀리서 볼 때는 잔잔하게 보인다. 바다도 그렇다. 실은 미세한 물결이 그 온몸을 이룰지라도 멀리서 보면 잔잔해 보이기도 한다. 물론, 그것은 착각이다. 바다는 한 번도 잔잔했던 적이 없으니. 그렇게 보고 싶고 그렇게 믿고 싶은 마음이, 이 세상에는 없는 '잔잔한' 바다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예전에 내가 적었던 시 중에서 '잔잔한 바다'라는 시가 있다. 이 시에는 내 안에 존재하는 모순된 마음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일상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지낼 때 엉망진창인 내 속을 가리기 위해 노력하지만 사실 다른 한편으로는 들키고 싶어 하고, 누군가 이 속을 알아 주었으면 하는 마음. 나를, 내 감정을, 내 생각을 감추기 위해 거짓말을 쏟아내면서도 한 편으로 거짓말을 괴로워하고 그만두고 싶어하는 마음.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으로 상처 받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사는 게 편하다고 자기세뇌를 하는 마음. 모든 일, 모든 관계들로부터 도망가고 싶어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마음.] 이 담겨 있다.
내 마음이 이토록 조각조각 나 있었던 이유는 사실 아무것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내 모습도, 내가 살아가는 방식도, 타인이 나를 대하는 방식도 전부 다 용납할 수 없었다. 나는 화가 잔뜩 나 있었다.그러나 내 분노는 무력했고, 나는 화풀이를 하듯이 그 모든 것들을 꾹꾹 눌러 담아 시를 썼다. 내 시들은 오롯이 나의 분노로 피워낸 꽃들이었다.
그런 나를 꺾어 놓은 건, 다름 아닌 내가 사는 현실에 대한 직시였다. 내가 가진 특성, 내가 반복해서 겪는 일과 인간관계의 문제에 대한 직시. 그 이전과 다르게 살고 싶다면 그 이전과 다른 선택이 필요했다.문제가 되는 일과 인간관계들로부터 도망가는 게 익숙한 내가 더 이상 도망가지 않는 선택지를 골라야 했다. 그리고 그런 선택을 하기 위해 기존에 갖고 있던 논리의 변화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은 '인정'하는 것을 통해 실현되었다.
우선 매일매일이 내맘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 중요한 존재가 아님을 인정하기로 했다. 또한, 사랑받기 위해 아등바등거리며 누군가에게 중요한 존재가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어떤 시간은 그저 버티고 견디면서 흘려보내야 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이 모든 생각을 올해 1월에 했다. 정말 괴롭고, 시간이 가지 않았던 1월이었다. 노래를 아무리 크게 틀어놔도 안 좋은 기억과 불안한 미래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가장 힘들었던'이라는 것이 갱신되지 않길 바라며 살아왔건만 현실의 불행은 늘 새롭게 갱신되었고질리도록 새롭게 힘들었던 1월이었다.
누가 나를 알아준다는 게 이제는 정말 공허하다. 그리고 이런 말을 또 하고 있는 스스로가 많이 지겹다. 냉소적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사실이기도 한 건, 아무도 나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안다'라는 게 허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 정도로 인간관계에 대한 욕구가 바닥을 쳐 본 적은없었다. 늘 투덜거리면서도 어느 정도는 원했고 필요로 했는데, 스스로 납득을 못 시켜 왔던 것들이 납득이 되어 버렸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아니, 내 그릇에는그간의 관계들이 과했다는 것을.
나는 2월에 인스타를 탈퇴하고, 모든 단톡방을 나오면서내 그릇에 넘치던 타인의 시선을 한꺼번에 제거했다. 그러고 나서 어색한 자유로움과 때 묻은 명랑함을 느꼈다. 아무도 나를 몰랐다면 내가 했을 선택이 뭔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가 얼마나 타인을 의식하고 살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분수에 맞지 않게 얼마나 많은 것을 욕심내고 살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이 더 이상 내게 슬프지 않은 것도 알 수 있었다.
벌써 2월이 다 끝나가지만 나는 아직 올해 목표가 없다. 그저 충실히 돈을 벌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차근차근 답을 해보려고 한다. 내가 원하는 것과 가질 수 있는 것 그 사이에서 고민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