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돈, 괜찮을까?
사랑? 웃기지 마. 이젠 돈으로 사겠어. 돈으로 사면 될 거 아니야.
얼마면 될까? 얼마면 되겠냐?
얼마나 줄 수 있는데요?
지금도 회자되어 농담처럼 자주 쓰이는 말 중 하나인데, 2000년 KBS에서 절찬리에 방영됐던 '가을동화' 속 명대사다. 당시 원빈의 표정과 말투 하나하나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물론 오늘의 글과는 조금 반대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사랑으로 시작된 연애와 결혼, 그 안에서 돈 이야기를 빼놓을 수 있을까. 사실 사랑하는 사이에도 돈은 분명 중요하지만, 계산적으로만 따지다 자칫 잘못하면 서운해지거나 오해가 쌓이기 마련이다. 아직 결혼을 해본 적이 없는 나는 결혼한 부부들이 어떤 방법으로 재테크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연인 관계일 때 경험했던 돈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풀어보고 싶다.
우선 나는 돈을 경시하지도 터부시 하지도 않는다. 흔히 커플들 사이에 데이트 비용 문제로 미묘한 감정싸움이 이어지거나 서로 눈치 보는 경우가 꽤 있는데 누가 내야 하는지, 얼마나 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쟁쟁한 걸로 알고 있다. 이건 마치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서도 얼마까지 돈을 빌려줄 수 있으며, 아니 애당초 채무관계를 맺는 것 자체가 옳은가까지 따져볼 문제라고도 생각한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나는 이 문제를 조심스럽지만 명료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그 애매모호함 때문에 가족 간에도, 연인 간에도, 친구 간에도 분쟁이 생기거나 사소한 말다툼이 번져 서로의 사랑을 의심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경우도 여럿 접한 것 같다. 참 어렵다. 그놈의 돈돈!
내가 만났던 지난 연애 상대들 중 유독 나와 돈 문제로 부딪혔던 이가 있었는데 그게 또 깊게 들어가면 워낙 사적인 영역이라 말하기 조심스럽다. 혹자는 그 모습을 보고 사랑하는 사이에 너무 계산적인 거 아니냐고 말한다면, 글쎄... 나는 합리적인 편이라고 답하고 싶다.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돈 문제는 깔끔한 게 좋다는 게 내 지론이고 그래서 친한 관계일수록 '돈'이라는 주제가 화두에 올라오지 않게 신뢰감을 주는 편이다. 이를테면 여럿이 식사를 한 후 누군가가 혼자 부담하고 나중에 돈을 보내주기로 한 경우, 꼭 늦게까지 돈을 주지 않는 이들이 있다. 그러면 좀 애매해지기 시작한다. 돈을 달라 말하기도 뭐 하고, 그렇다고 안 받기도 뭐 한 상황. 나는 이런 경우 깔끔한 편이다. 먼저 낸 상대에게 그 자리에서 바로 송금해 주거나 혹여 늦어질 경우 그 이유와 날짜까지 확실하게 미리 말해줘서 상대가 불편한 질문을 먼저 건네는 일이 없게 하는 편이다. 또한 맺고 끊음이 확실한 나지만 가까운 관계일수록 내가 더 내는 것에 인색한 편도 아니다. 특히 재정상황이 어려운 친구들의 경우에는 내가 선뜻 먼저 내거나 만날 때마다 내는 것도 크게 마다하지 않는다. 그 친구는 상황이 나아지면 얼마든지 나에게 돈을 쓸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만 느끼면 더 이상 누가 돈을 내고는 큰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근데 만약 상대가 어떻게든 돈을 안 내려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만나려면 네가 이 정도는 내야 하는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이라면? 이건 가깝고 멀고를 떠나서 염치와 예의의 문제로 넘어가기 때문에 철저히 계산적으로 행동해 준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던 나의 지난 남자친구들 중 유독 돈 문제로 부딪혔던 이는 다른 것(데려다주는 것, 연락하는 것,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챙겨주는 것 등)에는 지나칠 정도로, 아니 사실 불필요할 정도로(하지 않아도 된다는 데 한사코 하겠다고) 정성을 다했지만, 돈 앞에서만큼은 지나치게 계산적이고, 소극적인 사람이었다. '나는 너에게 별도 달도 다 따다 줄 수 있어', '내가 가진 걸 다 줄 수 있어'라는 말을 입으로는 연신 뱉으면서도, 정작 데이트 때 돈을 내야 하는 상황에서는 선뜻 먼저 나서는 법이 없었다. 자신이 낼까 말까를 재며 내 눈치를 보는 그 모습이 싫어 그냥 내가 내버리곤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돈을 매개로 하는 눈치게임은 정말이지 질색이다. 그 꼴을 보느니 차라리 내가 내고 말지. 그 눈치게임이 시작되는 순간 우리의 사랑까지 의심하게 되는데, 그럴 리 없을 거라 생각하며 먼저 내버리는 게 내 경우의 최선이었다.
몇 번의 고비를 넘기고 우리는 결국 돈 때문은 아니지만, 그의 지나치게 계산적인 모습(내가 이만큼 표현했으니까 너도 해, 내가 먼저 연락했으니까 네가 와, 내가 데려다줬으니까 나 집에 도착할 때까지 너도 자지 말고 기다려, 나를 사랑한다면 증명해봐 등) 때문에 헤어짐을 맞이했지만, 세상에 이런 연애도 있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만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 그의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타인에게만)인색한 경제관념 덕분에 정이 떨어졌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 외에도 그는 모든 일상에서 자신이 조금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 이리 빼고 저리 빼면서 정이 뚝뚝 떨어지게 만들었다. 그 미묘한 기싸움의 시작은 아마 돈이었겠지. 그와 헤어지던 날 각자의 집 방향으로 돌아서자마자 핸드폰 알림이 울렸다. 데이트 통장에 있던 돈을 정확하게 반으로 나눠 이체한 은행 알림이었다. 그날 헤어지기 위해 마지막으로 만나 마셨던 커피값을 제외하고 남은 잔액의 절반이 내 통장으로 입금됐다. 허허허.
그래, 사랑에도 돈이 필요하다. 낭만과 현실은 확실하게 구분하는 것이 옳다. 오히려 그걸 로맨스라는 이름으로 터부시 하는 게 더 비겁하다 생각한다. 결혼을 약속한 사이에도 돈 때문에 갈라서는 경우가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연애를 하면서 상대의 말보다 행동을 더 신뢰하는 편이다. 나 또한 상대에게 내 진심을 보여줄 때는 말보다 행동으로 보이려 노력하는 편이고 말이다. 상대에게 내 시간과 돈을 기꺼이 쏟을 수 있는가가 그 연애의 신뢰와 지속을 판가름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백날 천날 번지르르한 말로 사랑의 언어를 쏟아내도 정작 돈을 내야 하는 상황 앞에서 머뭇거리며 어떻게든 내지 않으려는 상대의 모습을 직면하는 것은 참... 여러모로 나를 비참하게 만든다. 나는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만큼은 돈에 인색한 편은 아닌데(반면 평소 나에게 쓰는 돈은 좀 궁상스러운 면이 있다), 그렇지 않은 상대의 모습이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은 사실이니까. 그리고 그런 상대의 모습을 보면 나도 철저하게 계산적이고 싶어 지니까. 그 미묘한 심리전에 빠지지 않게 애초에 신뢰관계를 잘 형성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게 앞서 말했던 말보다 행동으로 나의 시간과 돈을 얼마나 투자할 수 있는지를 직접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누군가는 이런 나의 모습을 계산적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계산적인 사람이 맞다. 상대의 감언이설 같은 낭만적인 언어만 가지고 사랑에 올인 하기에 내 나이는 이제 어리지 않다. 우리는 이제 진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상대의 진심이 온전히 느껴졌을 때, 우리 사이에 더 이상 돈의 많고 적음은, 누가 더 내고 덜 내고는 중요하지 않아 진다. 마치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