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창조가치
창조가치란,
창조적인 일을 통해 얻어지는 의미. 유형이든 무형이든 가치 있는 뭔가를 창조하는 행위. 즉 일, 육아, 교육, 예술활동이나 학문, 사업이나 봉사활동에 몰두함으로써 사람은 로고스를 각성시켜 생명 에너지를 충족시킵니다.
같은 일을 해도 '할 수 없이 한다는 것'과 '이건 내가 해야 되는 일, 의미 있는 일이다.'라는 생각으로 하는 일은 아주 다릅니다. 후자의 경우 일을 한다는 건 창조가치의 실현입니다.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시형, 박상미
나에게 창조가치란 다름 아닌 글쓰기다. 어릴 때부터 이것저것 끄적거리는 것을 좋아했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여기저기 부유하는 감정의 고리들을 단어로 엮어 글로 기록하는 행위 자체를 즐겼다고 해야 할까.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했던 것은 아니었고 그냥 습관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다.
글을 계속 쓰면서 알았다. 내가 글쓰기를 좋아하고 지속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들에 대해서 말이다. 우선 첫 번째는 나를 지키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는 외롭지 않기 위해서였다. 글을 쓰는 동안만큼은 정말 자유로웠다. 글을 통해 나의 내면이 치유되었고, 억눌려왔던 감정들이 글로써 풀어질 때마다 개운함이 밀려왔다.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만만하게 보는 이 사회에서, 목소리 큰 사람이 이겼다고 생각하는 이 사회에서, 굳이 말하지 않는 건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똑같은 방식으로 대응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 사회에서, 나처럼 침묵하는 이들에게 '할 말이 없으니 못하는 거 아니냐'고 무례하게 말하는 이 사회에서, 나는 그저 할 말이 없거나 몰라서 침묵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글로써 천천히 표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때부터 계속 일기를 써왔다. 그 일기에 내가 정말로 담고 싶은 이야기를 쓸 수는 없었다. '참 잘했어요' 도장을 꾹 찍어 돌려받는 일기에 나의 진짜 속마음을 일일이 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중학생이 되면서 나만의 일기장을 만들었다. 누구에게도 공개할 수 없는, 나의 내면적인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일기장 말이다. 그 안에는 나의 일상을 비롯해서 기쁨, 슬픔, 상처 등 누구에게도 전하지 못한 나의 목소리를 가감 없이 쏟아냈던 것 같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일기 쓰기를 계속했다. 때로는 누군가를 향한 사랑고백이, 때로는 누군가를 향한 비난의 화살이 되기도 했다. 어느 누가 시켜서도 아닌, 그저 나를 위한 시간들이었다. 답답했으니까. 그리고 외로웠으니까.
이 외로움은 사람으로 채울 수 없는 외로움이라 생각했다. 고독과 외로움은 다른 것이라고 하던데, 아마 내가 갖고 있는 이 본질적인 감정은 고독(혹은 공허함, 허무함)에 더 가까웠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이기에 누구나 갖고 있는 고독감. 혼자 있어도, 둘이 있어도, 여럿이 있어도 외로움과 고독 그 사이 경계의 시간들이 존재했고, 그걸 해소하기 위한 방법이 글쓰기였다. 글이 잘 써지지 않는 날에는 책을 읽었고, 책이 잘 읽히지 않는 날에는 글을 썼다.
그래서 이 길을 사랑하고, 이 길을 함께 걸어가는 이들을 사랑한다. 세상은 빠르게 변해가고 있고 그 속도에 맞춰가야만 한다면, 글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세상의 흐름을 역행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책을 읽는 것도 이와 비슷하게 치부되기도 한다. '세상에 볼 게 얼마나 많은데 그 바쁜 시간에 답답하게 그러고 있어?', '핵심만 압축해 놓은 영상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걸 천천히 다 읽고 있니?' 쉽게 갈 수 있는 일도 어렵고 느리게 돌아가는 나의 우직함이 가십거리처럼 누군가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때면 대응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는 것을 서서히 알아갔다. 나는 그저 그들의 속도에 맞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 대열에 합류할 생각도 없었다.
꽤 오래전 일이지만, 자유도서를 소개하는 한 독서모임에서 어떤 회원은 자신의 책을 소개하며 아무렇지 않게 이런 말을 건넸다.
"근데 솔직히 책 한 권 다 읽고 있는 거 시간 아깝지 않아요? 유튜브로 보면 30분이면 끝나는 내용인데, 저는 시간 아깝더라고요."
이 말을 정말 아무렇지 않게 점심 메뉴 고르듯 뱉어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문득 이런 질문을 하고 싶었다. '그럼 독서모임은 왜 나오신 거예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나오신 거죠?'
물론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그때부터 그녀가 우리에게 하는 말들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책과 전혀 관련도 없는 자신의 일상과 푸념을 이어가며 요즘 재미있는 건 뭐가 있냐고 맥락도 없이 다짜고짜 질문하는 그녀의 모습에 불편함이 올라왔다. 그 뒤로 참석자 명단에 그녀의 이름이 올라올 때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참석하고 싶은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그렇게 그 모임과 나의 연은 서서히 멀어져 갔다.
조금 다른 이야기를 꽤 길게 늘어놓았는데, 다시 창조가치에 대한 내용으로 돌아와 보자면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자신의 저서인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자발적인 활동은 창조적 활동의 성질을 뜻하며, 자유라는 문제의 해답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자발적인 활동이 어째서 자유라는 문제의 해답이 될 수 있는가? 앞에서 우리는 소극적인 자유가 개인을 고독한 존재로 만들고, 그래서 개인과 세계의 관계는 멀어지고 불신으로 가득 차며, 개인의 자아는 약해지고 끊임없이 위협받는다고 말했다. 자발적인 활동은 인간이 본래 모습을 희생하지 않고 고독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다. 자아를 자발적으로 실현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을 다시 세계와 - 인간과 자연 및 자신과 - 통합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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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창조가치로 봤을 때, 계속해서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자발적인 활동이자 자유로움 그 자체이다. 또한 나의 감정 기저에 깔려있는 외로움과 고독, 공허함, 우울함 등의 감정들을 위로할 수 있는 행위가 나에게는 글쓰기였다. 누군가 곁에 있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나를 더 깊이 이해하고 싶었다. 그래서 썼고, 쓰고 나면 마음이 후련해졌다. 거창한 담론에 대한 글을 쓸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나라는 사람이 어떤지 정도는 풀어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오늘도 글을 쓰며 나라는 세계를 더 넓혀 간다. 또한 나와 관계가 없는,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글을 읽으며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함께 넓혀갈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