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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Feb 23. 2023

서점을 열고야 말았습니다

<그래서 책방> 일일점장

독립서점, 독립서점 그렇게 노래를 부르면서 허구한 날 찾아다니더니 결국은 서점 주인이 되고야 말았다. 나의 오랜 프로젝트가 드디어 실현된 날을 기념하며 오늘은 서점 방문기가 아닌 서점 운영기의 글을 남겨보려 한다.


이곳에서 하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욕심을 조금 내려놓기로 했다. 손님이 있는 날보다 없는 날도 많다는 사장님의 말씀에 '오히려 다행이다'라고 속으로 외쳐보기도 했다. 손님이 찾아오지 않더라도 그 안온한 공간에 나를 넣어준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게 나는 <그래서 책방>의 일일점장이 되었다.



그래서 책방은 종로 방산시장에 위치한 작은 독립서점이다. 방산시장 중에서도 구석 쪽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어 지도를 보고 호수를 찾아가는 중에도 계속 길을 헤맸다. 그래서 책방은 서울도서관의 <서울형책방>이라는 동네 서점 지원 프로젝트를 통해 우연히 알았고, '그래서 책방의 상상' 프로젝트인 <그래서 목요일> 일일점장도 알게 됐다. 시즌 6을 마지막으로 진행이 멈춰있길래 사장님께 직접 연락을 드려 시즌 7의 재개여부를 여쭤봤더니 놀랍게도 그날 바로 공지를 올리고 시즌 7을 열어주셨다. 그렇게 시작됐다. 이 모든 일들이. 처음 그 메시지를 보냈던 게 작년 12월 말인데, 1월과 2월에는 바쁜 회사 일정으로 애초에 2월 말로 계획을 잡았다.


소개글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안녕하세요.
자칭 책쟁이 해연이라고 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 세 가지가 읽고, 걷고, 쓰는 것인데요. 독립서점을 이곳저곳 탐방하는 것 또한 저의 오랜 취미 중 하나입니다. 일일점장의 로망을 항상 간직했는데, 그래서 책방의 일일점장 프로젝트를 오늘 우연히 알고 얼마나 기쁘고 반가웠는지 몰라요. 이 공간을 다정하고 따뜻하게 채워보고 싶습니다.


책방을 소개하는 글도 짧게 전해보자면,

황보름 작가의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라는 책을 혹시 읽어보셨나요?
작가는 휴남동 서점에는 "거리가 지켜지는 우정과 느슨한 연대가 있고 좋은 사람들과의 속 깊은 대화가 있다"라고 말합니다. 제가 꿈꾸는 책방의 모습이 있다면 휴남동 서점처럼 이곳을 방문해 주신 분들께 따뜻한 휴식처가 될 수 있기를 바라요.





떨리는 마음을 안고서 목요일을 기다렸다. 나만의 서점을 항상 꿈꿔왔었는데 작게나마 그 꿈이 현실이 된다니 너무 설레는 일이었다. 한 명의 손님이라도 방문만 해주신다면 환대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더 솔직한 마음으로는 아무도 오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설렘보다는 익명의 누군가를 마주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직은 더 크기도 했고, 궁극적으로는 나만의 서점을 작업실처럼 쓰고 싶은 마음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분주하게 이것저것 짐을 챙겼다. 생각해 뒀던 고민함과 포스트잇, 메모지, 읽고 싶은 책과 노트북까지 챙기니 가방이 한껏 무거워졌다. 운영시간은 1시부터 5시까지지만(내가 직접 정할 수 있다), 미리 가서 서점의 불을 밝혀두고 싶어 아침 일찍부터 집을 나섰다. 사실 지난달에 사전답사 겸 직접 방문하면서 길을 어느 정도는 익혀뒀다고 자신했건만, 한 달 사이에 고새 다 까먹고는 오늘도 여전히 길을 헤맸다(한번 길치는 영원한 길치). 그때는 퇴근길에 들러서 상점들이 정리하는 분위기였다면, 이번에는 이제 막 가게 문을 여는 곳이 많아 오고가는 발걸음이 분주했다. 종합시장에서 이렇게 긴 시간을 보내본 적이 없는 나에게는 꽤 낯선 문화도 있었는데, 시장분들은 이미 서로 다 아는 사이라 이집저집을 드나들며 안부를 주고받기도 했고, 반대로 너무 친해서(?) 서로 언성을 높이는 모습들도 간간이 보였다. 여러 부품과 자재, 의류 등을 판매하는 공간에 덩그러니 위치한 서점이라니 다소 부조화스럽기는 했지만, 그분들도 젊은(?) 내 모습이 신기했던지 오며 가며 서점을 한 번씩 쳐다보시는 눈길이 느껴졌다(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많은 분들이 나를 흘끗 쳐다보시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분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준비해 간 음악을 블루투스 스피커에 연결해 틀어두었다. 서점 곳곳에 설치된 은은한 조명도 차례차례 불을 밝혔다. 자리에 앉아 일일점장 일지도 쓰고, 사장님이 몰래 두고 가신 선물도 풀어보았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오지 않을 것 같은 손님들을 기다렸다. 4시간 동안 총 두 분의 손님이 잠깐 들렀다 가셨고, 그 외의 시간들은 온전히 나만을 위한 작업실처럼 고요하고 잔잔하게 흘러갔다.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 안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진짜)점장님께는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너무 낭만적이었다. 수익 창출에 대한 압박이 없는 것에서 오는 편안함이랄까(이래서 좋아하는 일은 취미로만 간직해야...). 시간은 째깍째깍 잘도 흘러갔다. 어느새 문을 닫을 시간인데도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 계속 미적거렸다. 5시가 조금 지나서야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 복도 쪽에 큐레이팅해 두었던 나만의 추천도서부터 차례차례 정리했다.


나만의 추천도서란의 원래 계획은 내향인을 위한 책들로 채우고 싶었는데, 그래서 책방에는 내가 계획했던 책들의 재고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내가 마음속으로 정해둔 책들이 이 책방에 반드시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는데 왜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했을까. 그래서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내가 그동안 읽었던 소설들 중 나의 감정선과 결이 닿았던 소설과 에세이로 가볍게 꾸며봤다. 준비해 간 고민함도 그 옆에 살포시 놓아두고 펜과 메모지도 함께 두었다. 결국 마감시간까지 아무도 이 서점에서 책을 구입하지도, 고민함을 채워주지도 않았지만 나에게는 오늘 하루가 꼭 선물 같았다. 가장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진 공간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간을 보낸 것이다.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책을 읽으며 글을 쓰는 삶. 내가 그토록 원했던 삶. 꿈이 현실이 되는 귀한 경험을 했다는 것만으로 나는 이미 충분히 채워졌다(점장님, 죄송해요).


방산시장을 방문해 본 것은 그래서 책방 덕분이다. 시장의 분위기는 대체로 밝았다. 생기 있는 표정과 말투로 화통하게 대화를 이어가시는 시장분들의 모습에 가만히 미소 짓기도 했다. 길을 잃고 헤매는 나를 딱하게 바라보시며 농담을 건네시던 상점 어르신들의 다정한 말들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은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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