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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Mar 02. 2023

내가 말하고 있잖아

모르는 사람을 만날 때면, 나는 그 사람의 지금을 보려고 노력한다. 가정환경, 장애, 성적 취향, 정신 질환 등 나의 선택이 아닌 것들이 나의 것이 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것들이 '나'를 정의하고 증명하는 무언가가 된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애초에 선택권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중략)
차별을 하지 말라 하며, 다양함을 존중하자고 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고유성이 있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실상 개인을 들여다볼 때는 그 사람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고 어떤 습관을 지녔는지 만큼이나 주변 환경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당연한 것'에 대해 쉽사리 상대의 삶에도 대입시키곤 했다.

<친애하는 당신에게> 정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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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주 느끼는 감정 중 섬세하게 집중하는 감정이 있다면 바로 불안함이다. 예기치 못한 상황을 잘 견디지 못하는 나는 불안이라는 감정을 늘 기저에 깔고 살아간다. 괜찮은 날에는 그 불안감이 잘 숨어있다가도 괜찮지 않은 날에는 불쑥불쑥 올라와 나에게 경각심을 준다. 완전한 안정감은 얻을 수 없으니 나의 불안함을 늘 기억하면서 조심스럽게 다뤄가라고.


하지만 최근 들어 새롭게 다루고 있는 감정이 하나 있는데, 바로 억울함이다. 생각해 보면 이 억울함이라는 감정에서 정말 다양한 행동과 말이 뻗어 나온다. 흔히 말하는 서운하다, 섭섭하다도 실은 이 감정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적어도 내 경우는).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이런 거지. 나는 이 상황에 이렇게나 진심을 쏟았는데, 상대가 나의 진심을 몰라줄 때 서운하거나 섭섭한 마음이 올라온다. 하지만 이 감정들의 기저에는 억울함이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만 혼자 노력하고 있는 것 같은 억울함 같은 것?


화라는 것도 비슷하게 시작되지 않을까. 우리는 보통 화가 날 때(시도 때도 없이 화내는 사람은 제외하고), 그 화가 어디서부터 시작되고, 왜 시작되었는지를 면밀히 관찰하지 않는다. 심지어 화로 표출되어야 하는 감정이 아님에도 화라는 감정으로 표출되는 경우도 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슬픔, 서운함, 억울함, 우울함, 걱정스러움 등의 다양한 감정을 느꼈음에도 그 감정의 꼬리표를 어떤 것으로 정해야 할지 몰라 화라는 감정으로 표출하는 것이다.


이 글의 서문에 적은 문장은 <친애하는 당신에게>라는 책의 내용 중 가족력이라는 주제 글의 일부다. 내가 의도하지 않은 것들이 나라는 사람을 설명하는 꼬리표처럼 따라올 때의 억울함을 담아낸 것이다. "가끔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상대의 등에 비수를 꽂고도 그것이 비수인지조차 모르는 때가 있었다."라고 말하는 정재현 작가의 말처럼,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의지와 상관없이 꼬리표처럼 따라오는 나의 주변 환경들에 억울한 감정을 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내 감정을 스스로가 모를 때가 많다. 올라오는 감정을 즉각적으로 알아채는 과정은 여전히 어렵다. 흔히 감정기복이 심한 사람들을 어른스럽지 못하다 지적하기도 하는데, 그 기복이 때로는 이유가 없거나, 이유가 있어도 알지 못하거나, 이유를 알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거나 등등 너무나 많은 경위가 있다. 나도 그 어디쯤에 속해있는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럼에도 내가 조금 더 다듬어주고 싶은 감정은 억울함이 맞다. 어쩌면 나의 글도 억울함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왜 자꾸 너만 말하려고 해. 내가 말하고 있잖아."라고 속으로 외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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