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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Jun 22. 2023

더욱 충만하고, 더욱 사랑스럽게

그는 책을 펼쳤다. 그와 동시에 그 책은 그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책장을 펄럭펄럭 넘기며 짜릿함을 느꼈다. 마치 책장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짜릿한 느낌은 손가락을 타고 올라와 그의 살과 뼈를 훑었다. 그는 그것을 어렴풋이 의식했다. 그러면서 그것이 그를 가둬주기를, 공포와 비슷한 그 옛날의 설렘이 그를 지금 이 자리에 고정해 주기를 기다렸다.

<스토너> 존 윌리엄스



1965년에 출간된 이 소설은 거의 50년이 흐른 뒤에야 미국이 아닌 유럽에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고 한다. 책 두께에 비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줄거리는 꽤나 단조롭게 느껴진다. 주인공인 스토너는 학자로서 명성을 떨치지도, 교육자로서 학생들의 인정을 받지도, 사랑에 성공하지도 못했지만, 우직하고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혹자는 그의 인생을 실패라고 단정 짓기도 했지만, 글쎄 내 생각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 각자의 삶은 각자가 추구하는 방향이 다 다를 테니 말이다.


그는 자신을 인류의 일원으로 붙잡아줄 친밀한 우정을 원했고, 혼자 있기를 원하면서도 결혼을 통해 다른 사람과 연결된 열정을 느끼길 원했으며,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으나 평생을 무심한 교사로 남았다. 순수성과 성실성을 꿈꿨으나 몰려드는 시시한 일들에 정신을 빼앗기고 지혜보다는 무지에 가까운 죽음을 맞이한다. 꽤나 허망한 삶이라고 해석하는 이들도 더러 있을 테다. 그는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한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나의 삶에 중요한 키워드가 무엇이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아니 더 나아가 내가 이 삶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만히 되짚어본다. "너는 무엇을 기대했나?"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스토너의 마지막 모습처럼, 나 또한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 나에게 질문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내가 원했던 삶을 살았냐고 말이다. 그에게는 교육자의 삶이 있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꿈도 목표도 없던 그가 우연히 접했던 영문학 수업에서 운명을 만난 것이다.



"모르겠나, 스토너 군?" 슬론이 물었다. "아직도 자신을 모르겠어? 자네는 교육자가 될 사람일세."
(중략)
"이건 사랑일세, 스토너 군." 슬론이 유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는 사랑에 빠졌어. 아주 간단한 이유지."



죽는 순간까지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그의 마지막이 꽤나 허망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슬픔과 고독을 온몸으로 맞아가며 버티는 그의 무기력한 모습에 답답한 마음도 올라왔고, 소위 말하는 '나쁜 남자'라 칭하는 분도 계셨다. 그는 가정 문제에 소홀했고 회피하는 남편이었으니까. 심지어 바람도 피웠지. 물론 그 시대의 가치관으로 보자면 진짜 사랑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뭐 내 기준에서는 바람이다. 그걸 차치한다면 어쨌든, 이 책을 읽는 내내 건강식을 먹는 느낌이 들었다. 이렇다 할 반전도 없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교수가 된 한 남자의 이야기. 그의 곁에서 종종 벌어지는 일들은 언뜻 보기에 소소하다 못해 시시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지난 나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봤을 때 내 곁에 남아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얼마 전에 친구와 통화를 하며 40살의 나를 그려보는 시간을 가졌다. 40살의 나와 34살의 나(아 이제 만 나이가 시작되면 32살). 두 사람(이지만 한 사람)이 만나면 서로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게 될까 가만히 상상해 봤다. 40살의 나는 지금보다 힘이 빠졌다. 체력이 떨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독기가 좀 빠졌다고 해야 하나. 지금보다 삶을 더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입가에 미소가 꽤나 자연스럽다. 늘 긴장으로 가득했던 나의 근육들이 한결 느슨하게 풀어진 기분도 든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삶은 그런 삶이다. 이렇다 할 이벤트보다는 그저 내가 하고자 하는 것들을 자유롭게 누리며 나만의 소소한 행복을 찾아가는 삶. 누구의 간섭도 교정도 없이 말이다.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어갈수록 생각이 깊어진다. 어떻게 늙어가는 것이 좋을까를 생각하고, 고집스럽지 않게 살고자 노력한다. '그럴 수 있지'라고 자조하듯 읊조리며 타인을 향한 이해(라 쓰고 포기라 읽는)의 폭이 넓어지길 기대한다. 무탈한 하루하루가 쌓여 반복되더라도 그 안에서 잔잔한 웃음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흘러가는 세월을 막을 수는 없다. 몸도 정신도 노화의 과정을 밟아가고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걸 부정하는 건 마치 떼를 쓰고 억지를 부리는 것만 같아서.


요즘 들어 아침에 화장을 할 때마다 부쩍 더 나이 들어감을 느낀다. 하루 중 내 얼굴을 가장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시간이기에 더 그런지도. 그럼에도 나는 지금의 나를 가장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종종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고 싶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는데, 그리운 시절이 있기는 하나 지금의 내 모습이 가장 사랑스럽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어릴 때는 생각이 '애늙은이' 같아서 주변 친구들에게 타박을 받을 때도 많았는데, 이제는 내 나이대로 생각하고 말해도 주변에서 그러려니 하는 게 사실 좀 편하다.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도 없고, 혼자 이방인 취급 당하지도 않고, 적어도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을 "그래, 너답다"로 인정받는다는 건 꽤나 건강해지는 감각이다.


다소 뜬금없지만 요즘 자꾸 소설을 배우고 싶다. 쓰기의 장르를 조금 더 넓혀가고 싶은 욕심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쓰고 싶은 주제와 인물은 명확한데 아직 한 번도 소설 쓰기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 일단은 기본기를 익히기 위해 이것저것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어떻게 쓰고, 어떻게 배우고, 어떻게 꾸준하게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 말이다. 정보를 수집하면서 나의 시간과 체력, 지속가능성, 비용까지도 차근차근 고려해 가며 각을 재는 중이다. 괜찮은 강의도 찾아보고 모임도 알아보는 중인데 생각보다 상업적인 내용이 많아서 실망스럽기도 하다. 턱없는 가격을 제시하는데 강의 내용은 왠지 모르게 시원찮고 허세만 가득 들어찬 느낌이다. 책 한 권 뚝딱 만들면 다 되는 것처럼 떠들어대는 그들의 마케팅이 내 눈을 더럽히는 느낌이 들어 불쾌함마저 올라온다. 어떤 곳에 가야 제대로 된 배움에 진입할 수 있을까 심혈을 기울여 찾고 생각한다. 일단 나 혼자 무작정 시작해볼까 싶다가도 너무 뜬금없는 곳에서 혼자 우물을 파고 있을까 걱정돼 운동화끈을 천천히 묶어보려 한다.


이렇게 오늘도 나의 평범한 일상은 계속되고 있다. 이 평범함이 실은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걸 매 순간 잊지 않는 나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내 삶은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처럼 이 방향대로 계속 흘러갈 것이다.

더욱 충만하고, 더욱 사랑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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