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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Jul 01. 2023

언어에 민감한 사람들

아름답게 어긋난다는 게

7월의 첫날인 오늘 영등포구에 위치한 문래도서관을 다녀왔다. 연고도 없는 그 먼 곳을 이 더운 날씨에 굳이 찾아간 이유는 다름 아닌 독서모임 때문이다. 내가 익히 알고 있던 정문정 작가(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의 저자)가 진행자라는 점이 흥미로웠는데, "우리, 소통"이라는 슬로건을 갖고 구립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대면 독서모임이었다. 우연히 알게 된 이 프로젝트를 보면서 세금이 제대로 쓰이고 있다는 생각(작가님도 같은 생각)에 기쁜 마음으로 신청해 뒀었다. 여담이지만 신청하면서 놀랐던 점 중 하나는 내가 이미 영등포구 도서관에 회원으로 등록돼 있다는 사실이었다. 언제 했었나 기록을 가만히 뒤적여보니 부모님과 함께 살 당시에 근처 동네라 등록해 뒀던 기록이 남아있었다.


길치에게 초행길은 치명적이다. 행여나 첫 모임부터 늦을까 걱정돼 아침 일찍부터 부랴부랴 준비를 마치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하지만 지각은 무슨 습관이 이렇게나 무섭다. 너무 일찍 출발한 나머지 이미 두 시간 전부터 도서관에 도착해 있었다. 남은 시간은 여유롭게 종합자료실의 서가를 둘러보며 책을 읽다가 모임이 시작되기 20분 전에 모임 장소로 올라갔다. 너무 일찍 가있으면 진행자가 부담스러울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작가님은 이미 도착해서 오늘 나눌 책의 내용을 정리하고 계셨다. 나는 작가님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일찍 온 나를 보며 가장 먼저 하셨던 질문은 "책 다 읽고 오셨어요?"였다. 나는 웃으며 다 읽었다 말씀드리고 자리에 앉아 노트와 펜을 꺼냈다. '아무렴 독서모임인데, 설마 책을 안 읽었을까'하는 생각에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했는데, 모임이 시작되고 그 질문의 이유를 알게 됐다. 참석자는 10명이 넘었지만 책을 완독하고 그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은 나와 다른 한 분, 그리고 작가님 이렇게 세 사람이 다였다. 심지어 코리안 타임마저 철저하게 적용됐다. 모임 시작 시간은 2시였지만 제시간에 도착한 사람은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사서님은 먼저 도착한 우리에게 죄송하다며(왜 사서님이 죄송하시죠) 양해를 구하고 지각자들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모임이 시작되고 1시간 후에 도착한 사람도 있었다. 어휴.


시작 전부터 순탄하지 않았지만 뭐 그럭저럭 모임은 시작되었다. 주제는 소통이었고 총 세 번에 걸친 모임이 약 3주의 텀을 갖고 진행될 예정이었다. 오늘이 첫 모임이었고, 30대 초반인 내가 상대적으로 어리게 느껴질 만큼 모임의 평균 연령대는 높았다. 직업 또한 누구 하나 겹치는 이 없이 다양했고 서점을 직접 운영하시는 분도 계셨다. 분명 취지는 독서모임이었지만 책을 읽고 온 사람이 거의 없어 작가님의 책 설명이 다소 길어졌다. 내가 기대한 건 책에 대한 각자의 감상이었지만 이것도 뭐 나름대로 나쁘지 않았다. 작가님 자체가 말을 워낙 잘 하시는 분이고, 적절한 설명과 중간중간 던져주시는 질문들도 생각할 지점이 많아서 좋았다.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도 가졌는데 흥미로운 건 책을 좋아해서 온 사람들보다는 책을 (너무)읽지 않아 온 사람이 더 많다는 점이었다. '책도 안 좋아하고, 지정도서도 읽지 않았다면 도대체 이곳에 왜 왔을까?' 하는 나의 물음표는 고이 접어 날려두기로 했다(그대들은 힐링캠프를 기대한 것일까).


우리가 함께 나눈 책은 동녘 출판사의 편지 시리즈 중 하나인 <우리는 아름답게 어긋나지>라는 책이었다. '언어생활자들이 사랑한 말들의 세계'라는 부제처럼 노지영, 홍한별 두 번역가가 번갈아가며 서로에게 쓰는 편지글 형식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한 번도 번역가라는 직업에 궁금증을 가져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다소 놀라기도 했다. 나와 다른 직업군에 늘 관심이 많았던 나인데, 왜 유독 번역가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은 없었을까. 오히려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볼 때가 더 많았던 것 같다. 이를테면 고전 문학을 읽을 때, 어떤 번역가의 글은 읽으면서 점점 격분하기도 하는데(아니 도대체 번역이 왜 이래!), 그럴 때면 망설임 없이 다른 출판사의 다른 번역가의 책으로 눈을 돌려버리곤 했다. 분명 같은 책인데도 번역가가 누구냐에 따라 전혀 다른 문장이 탄생하는 생소한 경험을 여러 번 거친 뒤로 번역가에 대한 신뢰감은 더더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것만 같았다. 그런 내가 번역가들의 서간 에세이를 읽다니. 아마 이 모임이 아니었다면 접하지 않았을 주제의 책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읽기 시작했고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오만했던 나의 모습과 편견들을 가만히 내려놓고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일은, 그들의 일은 감히 그렇게 폄하해서는 안 되는 영역의 것이란 걸 뒤늦게 알아버린 탓이다.



고심해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번역해 넣은 표현이 교정지에서 직역에 가깝게 바뀌어 있을 때 안타까워도 편집자에게 자신 있게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는 말. 아무리 공들여 번역한 문장인들, 원문과 멀어졌다는 비판 앞에서는 옹호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리지. 한없이 겸허해질 수밖에 없는 게 번역의 존재론적 숙명인가 봐. 원문이 절대 기준으로 존재하는 한 번역은 결코 완전한 것이 될 수 없으니까. 번역은 원문이라는 이데아에 얼마나 가깝냐를 기준으로 평가될 뿐 그 자체의 성취로 보이는 일이 없고, 아무리 잘해봐야 근사치일 뿐이고, 무수한 가능성 가운데 다른 것들을 포기하고 택한 하나일 뿐이고, 때로는 무언가를 얻으면 다른 것을 놓칠 수밖에 없는 제로섬 게임이니까.



번역가는 텍스트와 독자 사이의 중재자 역할이었다. 원문이 존재하는 한 번역은 결코 완전한 것이 될 수 없다는 문장에서 그들만의 고충을 가만히 생각해 보게 됐다. 모든 직업이 멀리서 보면 좋아 보이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다 저마다의 고충이 있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 정문정 작가님도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고전소설을 읽을 때마다 번역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하면 분노할 때가 많았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 생각이 달라졌다고 말씀하셨다. 과정을 알게 되면 욕(?)을 덜하게 된다는 우스갯소리도 함께 전하며 말이다. 나 또한 이 책을 읽으면서 번역가라는 직업의 특수성에 대해 여러 방면으로 생각하게 됐지만 무엇보다 내 마음을 아프게 했던 건 인정받지 못하는 그들의 노고였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늘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단순히 직역하며 찍어내듯 번역하지 않았다. 독자뿐만 아니라 당시의 시대상과 주변 환경 등 저마다의 상황을 세심하게 살피고, 고려하고, 고민해 겨우 한 문장씩 조심스럽게 옮겨내는 과정의 피나는 결과물이었다. 그럼에도 읽는 이의 해석은 왜곡되기 쉬웠고, 욕만 잔뜩 먹고 가치를 인정받지 못할 때도 많았다. 그들의 억울함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던 건 내가 하는 일과 맞닿는 고충이 있어서다. 잘하면 본전이고 못하면 바로 티가 나 욕먹기 일쑤인 나의 일처럼 말이다. 최근에도 시스템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를 처리하지 못한 타팀의 무능력함 때문에 우리 팀만 욕을 먹고 꾸역꾸역 그 일을 감당하게 됐다. 이게 맞나, 옳은 가를 일일이 따지고 들기에는 정해진 기한이 목을 조여 오는 바람에 지체할 겨를이 없었다. 결국 쳐내듯 빈틈을 메꿔가며 뒷수습을 하는 건 우리의 몫이다. 드러나지 않는 번역가들의 고충을 나와 동일시하며 공감하는 걸 보니 역시 인간은 다 자신이 처한 방식대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 같아 쓴웃음이 삐져 나오기도 했다.


여러모로 생각할 지점이 많은 신선한 모임이었고, 모임 중간 예상치 못한 타인들의 의견충돌(서로 다르니까 뭐)도 살짝 있었지만 그걸 중재하는 과정에서 작가님의 유연함이 돋보이기도 했다. 결국 이 모임의 슬로건처럼 중요한 건'소통'이니까. 우리가 흔히 대화를 할 때, 누군가의 말은 쉽게 받아들여지고, 누군가의 말은 들어보지도 않고 반대하고 싶은 마음부터 불쑥 올라오는 경우가 있다. 분명 저 사람의 말이 다 맞긴 한데 이상하게 아니꼽고, 반대로 이 사람의 말은 분명 틀렸는데 괜히 수긍하고 싶은 복잡 미묘한 심리는 결국 다 존중과 태도에서 비롯된다는 작가님의 말씀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속담처럼 말이다.


근데 한 가지 혼란스러웠던 점이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발표자의 말을 듣는 작가님의 태도 때문이다. 소통이 주제인데 발언자의 눈을 마주치지 않는 진행자의 모습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했을까. 갈 곳 잃은 나의 시선은 애먼 수첩을 향해 꽂혔고 시선이 아래로 향하자 목소리의 전달력도 떨어졌다. 평소 웅얼웅얼 거리는 화법을 답답하게 여겨왔던 나였지만 오늘의 내 모습이 딱 그랬다. 역시 인간은 자신이 겪어보지 않은 상황에 대한 이해가 이토록 부족하다. 나를 반성함과 동시에 진행자의 모습에 대한 기대치도 한없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작가님은 타인의 직업적 고충과 과정을 알게 되면 욕을 덜 하게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과정은 내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소통이 주제였지만 이건 소통의 불발이다. 적어도 눈을 마주치며 대화하는 게 대화의 기본이 아닌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 머릿속을 맴맴 떠돌기 시작하자 생선 가시가 목에 탁 걸린 것처럼 불편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과연 3주 후에 나는 두 번째 모임을 무사히 신청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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