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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Jul 05. 2023

녹을 줄 알면서도 눈사람을 만드는 그 마음처럼

오래전 브런치에서 읽었던 인상 깊은 글이 한 편 있다. '식당을 운영하거나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꼭 친절해야만 하는 것일까?' 하는 내용의 글이었다. 당시 그 글을 쓰셨던 작가님은 "친절에 특기가 없는 사람은 장사를 하면 안 되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끝으로, 친절함이 반드시 필요한 덕목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신 것 같았다. 나도 그 부분에 동의한다. 특히 감정 노동을 하고 계신 분들의 경우 그분들이 상대에게 반드시 친절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불친절과 안 친절은 다른 것이니까. 다만 친절이 가산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말 그대로 가산점 말이다.


스탠퍼드대학교 심리학 교수인 자밀 자키는 <공감은 지능이다>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우리 시대에 조금 더 필요한 것이 친절과 친절의 만남이고, 나와 다른 사람의 말을 더 깊이 들어주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친절해서 나쁠 건 없다는 것이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긴 한데 하면 좀 더 좋은? 뭐 그런 것? 근데 여기에 또 '다만'이 붙는다. 친절함을 당연시해서는 안된다는 '다만' 말이다.


얼마 전에는 브런치에서 "삼식이"라는 필명을 가진 영양교사의 글을 읽었다. 글 제목은 "나쁜 리더는 오래 못 가고 착한 리더는 아예 못 간다"였는데 그 글에 담긴 아이들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생각해 보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예를 들어 급식실에서 2명의 친구가 치킨을 더 먹으러 왔는데 딱 1개가 남았어요. 한 친구가 양보를 했어요. 다음에 또 같은 2명이 치킨을 받으러 왔어요. 그런데 지난번에 치킨을 먹었던 친구가 또 먹으려 하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난번엔 네가 먹었으니 이번엔 내가 먹을게"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해야 해요. 만약 "싫어 이번에도 내가 먹을래"라고 이야기하면 그 친구는 아주 나쁜 친구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생각만 하는 친구죠.



친절이 당연시 여겨지는 걸 넘어 그 친절을 이용하려 드는 상대를 만난다는 건 꽤나 씁쓸한 경험이다. 나 또한 사회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유형의 사람을 만나며 비슷한 경험을 여러 번 해왔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친절하지 않느냐? 사실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친절함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니까. 그걸 나쁘게 혹은 당연하게 생각하는 그 사람들이 나쁜 거지. 방금 소개했던 작가님도 이 글의 말미에 "모든 친구와 친하게 지내야 하는 게 아니라 좋은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좋은 친구를 사귀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내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착한 친구가 아니라 좋은 친구라는 것에 방점을 찍어본다.


직장 생활을 하기 전, 카페에서 1년 정도 아르바이트를 했던 적이 있다. 직접적으로 서비스업을 경험했던 건 그때가 처음이었고 카페의 모든 시스템들이 다 생소했다. 출근한 첫날은 낯선 환경과 낯선 사람들에 치여 우왕좌왕하다 그만 컵을 깨트리고 말았다. 허둥지둥 깨진 조각을 치우려던 나를 주변 직원분들이 다급히 말리며 괜찮다고 했다. 안 그래도 너무 많아 골치 아팠는데 잘했다는 농담까지 건네시며 나의 실수를 따뜻하게 보듬어 안아주신 것이다. 나는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그 매장에서 더 열심히 일하고 싶었다. 좋은 사람들이 모인 좋은 매장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실수를 너그러이 바라봐 주는 어른들의 모습을 보며 나도 그런 어른이고 싶다고 다짐했다. 지금으로부터 10년도 더 된 일이지만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그때의 실수를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는 것, 그 사람이 혹 실수를 했다 해도 처음엔 누구나 실수할 수 있을 거라는 넉넉한 마음 말이다. 놀란 직원에게 친절을 담아 따뜻한 말을 건네면 그 직원 또한 그 마음을 따뜻하게 받아줄 수 있을 거라는 작은 믿음도 담아본다. 선한 영향력이 뻗어가듯 그 직원이 친절을 전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말이다.


이 글을 쓰다가 오래전에 읽었던 정이현 작가의 <우리가 녹는 온도>라는 소설 속 문장도 떠올랐다. 그녀는 녹을 것을 알면서도 눈사람을 만드는 마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녹을 줄 알면서도, 아니 어쩌면 녹아버리기 때문에 사람은 눈으로 '사람'을 만든다. 언젠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오늘을 사는 것처럼. 곧 녹아버릴 눈덩이에게 기어코 모자와 목도리를 씌워주는 그 마음에 대하여, 연민에 대하여 나는 다만 여기 작게 기록해 둔다.



어제 퇴근길 버스에서 낯선 경험을 했다. 언뜻 보기에 초등학생 같았는데, 피곤한 나머지 연신 휘청거리는 나에게 그 학생이 자리를 양보한 것이다(오잉?). 순간 너무 놀라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학생 앉으라고 뒷걸음질 쳤는데, 그 예쁜 마음이 너무 고맙고 신기했다. 누군가에게 친절을 받았는데 그 누군가가 다름 아닌 나보다 어린 사람이라는 것에서 오는 감동은 꽤나 오랜 여운으로 남았다. 그 버스로 환승하기 전에 탄 버스에서는 노약자석도 아닌데, 버스에 타자마자 가장 만만해(?) 보이는 내 앞에 떡하니 서서 보란 듯이 자신의 가방으로 나를 쿡쿡 찌르는(때리는) 고약한 어른을 만난 직후라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래. 세상에는 여전히 이상한 사람들이 많지만, 그  수 못지않게 좋은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드러나지 않는 친절을 베풀며 꼭꼭 숨어있을 뿐. 녹을 줄 알면서도 눈사람을 만든다는 정이현 작가의 문장처럼, 나 또한 친절과 다정, 존중과 배려라는 단어들에 다시 한번 깊이 마음을 담는다. 세상이 점점 차갑게 변해간다는 말에 반기를 들어본다. 다 보여지지 않아서 그렇지 이 세상에는 아직 따뜻한 손길이 더 많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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