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내민해 Mar 06. 2024

권태의 늪에서 헤어 나오려면

그는 이제 예전처럼 그녀를 울리던 그토록 감미로운 말도, 그녀를 미치게 하던 그 격렬한 애무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가 푹 빠져 지내고 있던 그들의 엄청난 사랑이 마치 강바닥에 빨려 들어가는 강물처럼 그녀의 발밑에서 줄어드는 것 같았고, 그녀의 눈에 바닥의 진흙이 보였다. 그녀는 그것을 믿고 싶지 않아 더욱더 애정을 쏟았고, 로돌프는 점점 더 무관심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마담 보바리> 귀스타브 플로베르



오랜만에 비대면 독서모임에 참여했다. 화면 속에는 익숙한 얼굴과 낯선 얼굴이 골고루 섞여 있었다. 모임을 통해 알게 된 <마담 보바리>라는 소설은 꽤 유명한 고전이었다. 이 책을 쓴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사실주의 대표 작가라 불리지만, 정작 자신은 사실주의에 대한 증오로 이 소설을 집필했다 토로할 정도로 사실주의 작가로 평가받기를 끊임없이 거부했다고 한다. 리더님은 이 책이 시각적인 묘사만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것 같아 읽기 힘들었다는 어떤 이의 후기에 걱정스러웠던지, 대화방을 통해 문체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어떤 장면은 건조하고 간결하게, 또 어떤 장면은 화려하고 상세하게 늘어지는데, 그 이유를 리더님의 후기를 읽고 난 후에야 알게 됐다. 내 경우 이게 바로 고전의 묘미가 아닌가 싶어 오히려 좋았다.

시골 풍경에 대한 묘사는 마치 내가 그 장소에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섬세했고, 인물에 대한 묘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머릿속으로 인물들의 옷차림과 몸짓, 표정, 말투 하나하나를 생생하게 그려보기에 충분한 설명이었다. 구구절절하다는 누군가의 혹평에 걸맞을 정도로 말이다(내 경우에는 호에 가깝다). 덕분에 600페이지에 가까운 방대한 분량이 되었겠지만?


<마담 보바리>는 출판 당시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이 책을 둘러싼 스캔들은 문학사의 유명한 사건 중 하나일 정도다. 이 소설을 발표한 플로베르는 당시의 도덕과 미풍양속을 해쳤다는 명목으로 고소당해 법정에 서기도 했다. 결혼한 여자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불륜으로 인해 엄청난 빚을 진 뒤 감당하지 못한 채 음독자살하는 이야기는 분명 보편적인 삶과는 거리가 있다 여겨졌기 때문이다. 남편이 있는데도 끊임없이 바람을 피우며 다른 이들의 사랑을 갈구하고 집착하는 에마의 모습은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외로움을 채우줄, 의존할 누군가를 찾는 걸 멈추고 본인의 외로움은 결국 본인의 몫이라는 걸 알기를 바랐다. "나 좀 어떻게 해줘"라고 자신의 사랑을 일방적으로 강요해 봤자 다들 질려 도망치기 바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걸 단순히 불륜의 문제로만 보기는 어려웠다. 이 책의 전반적인 스토리는 "불륜"이라는 거대한 키워드를 관통하고 있었지만, 내 생각에 그건 표면적인 주제일 뿐이고, 더 큰 중심에는 "권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에마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결핍의 문제가 계속해서 눈에 보였고, 그 중심에 둘의 관계에 대한 권태가 느껴졌기 때문이다(어느 것이 더 먼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진정으로 사랑하는데 권태로울 수 있나', '행복한데 권태롭다는 건 뭐지?' 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다들 알면서도 쉽사리 꺼내지 못하거나 아니면 그걸 인식하는 순간 삶이 너무 허망하게 느껴져 차마 모른 척하고 살아가는 건 아닐까 싶은 여러 주제에 대해서도 생각이 깊어졌다. 사랑하는 상대가 관계에 권태감을 느끼고 있다는걸, 이론적으로 아는 것과 온 마음으로 알게 되는 건 또 다른 충격일 테니 말이다(언제나 말은 쉽지요). 그리고 더 나아가 삶의 의미 또한 마찬가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 경우 삶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면 할수록 역설적으로 허무함이 배가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동진 평론가의 <파이아키아>라는 유튜브 채널을 종종 보는데, 꽤 오래된 영상이지만 그가 했던 말 중 "사람은 필연적으로 이루어진 꿈에 대한 권태와 결여를 느끼게 된다"는 말도 떠올랐다. 자신은 꿈이 없어서 그나마 덜 불행했던 것 같다고, 꿈이라는 건 이루고 나면 행복할 것 같은데, 막상 그 꿈에 닿고 나면 권태를 느끼게 된다고 말한다. 나는 그 영상을 보면서 꿈의 속성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삶에 대한 관점도 비슷하게 바라봤던 것 같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겠지.


자주 언급했던 말이지만, 나는 어떠한 관계도 당연한 것은 없다 생각한다. 사랑이 중심에 있어도 그 사랑을 소중하게 여기고 가꾸지 않으면 관계는 사라질 수 있다. 노력이 수반되어야만 그 관계는 생명력을 잃지 않고, 권태롭지 않고(매우 중요), 오래갈 수 있다 생각한다. 그리고 이왕이면 서로가 서로에게 선한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라고(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노력 같은 것), 완성형이 아닌 진행형으로 계속되길 바란다. 조금 다른 예지만 누군가에게 찾아올지도 모를 독서모임의 권태로움 또한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계속해서 신입 회원을 받으며 생기를 불어 넣어줄 상황만 좇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봐왔던 멤버라도 다 안다고 자만하지 말고, 계속 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야 그 모임이 균형감 있게 나아갈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새것만을 추구하는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설령 그 욕심을 채운다 해도 또 다른, 더 큰 욕심만 계속해서 생겨날 테니.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공허감만 더해가고 더더 자극적인 상황만을 쫓는, 흔히 요즘 말로 도파민형 인간? 이 되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걸 견디지 못하면 권태감이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더 느리게 살아가고 싶다. 부러 속도를 늦추고 주변을 찬찬히 돌아보며 말이다. 뭉근하게 타오르는 불처럼 잔잔한 일상의 행복을 알아차리고, 오늘을 밀도 있게 잘 살았다는 느낌에서 오는 충만함. 그 충만함을 더욱 깊이 감각하고 사유하는 사람이고 싶다. 관조하는 사람이고 싶다. 지난 주말, 파주를 다녀왔는데 일몰을 보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붉은색으로 천천히 물들어가는 하늘이 너무나 아름다웠고, 이 아름다움을 온전히 내 눈으로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3월의 시작이 너무나 충만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배우가 되고 싶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