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느림'은 게으름이 아니었다

가장 성실한 삶의 태도였다.

by YEON WOO



우리는 언제부턴가 속도를 미덕처럼 여기며 살아왔다.

‘빨리빨리’라는 말은 한국 사회의 집단적 성격을 함축하는 언어가 되었고,

효율과 생산성은 개인의 가치를 측정하는 잣대가 되었다.

그러나 속도가 높아질수록 삶의 풍경은 오히려 흐릿해졌다.

모든 것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 버리니, 정작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조차 자각하지 못한다.

속도는 많은 것을 가져다주지만, 동시에 삶의 결을 지워버린다.

나는 시골에서 비로소 그 사실을 체감했다. 느려진 생활 리듬은 처음엔 두려움이었다.

게으름으로 보일까, 뒤처진 것처럼 보일까 하는 불안이 나를 옭아맸다.

하지만 그 느림 속에 오래 머무르다 보니,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장면들이 차례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느림은 단순히 동작의 늦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것은 세계와 맺는 관계의 깊이가 달라지는 경험이었다. 빠르게 지나치면 사물은 기능으로만 남는다.

나무는 그늘을 주는 도구이고, 채소는 배를 채우는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느림 속에서 바라보면, 나무는 계절마다 다른 색을 품는 존재이고,

채소는 햇살과 흙, 물이 함께 엮어낸 생명의 결실이다.

느림은 사물에게 존엄을 되돌려준다.

존재가 단순히 ‘쓸모’가 아니라 ‘있음’ 그 자체로 빛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사물과 가까이 머무는 것”을 존재의 본질로 설명했다.

나는 느림이야말로 그 가까움을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게으름은 관계를 끊어내는 무관심이지만, 느림은 오히려 더 깊이 응시하고 더 오래 곁에 머무르게 한다.

그것은 나와 세계를 묶는 새로운 방식의 부지런함이었다.


또한 느림은 시간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열어준다. 빠른 삶은 늘 미래를 향해 내달린다.

오늘은 내일을 위한 준비이고, 지금은 곧 사라질 찰나다.

그러나 느린 삶 속에서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원으로 다가온다.

아침 햇살이 저녁으로 이어지고, 계절은 다시 돌아온다.

이런 순환적 시간의 감각 안에서는 ‘성과’보다 ‘과정’이 중요해진다.

무엇을 얻었는가 보다, 어떤 방식으로 하루를 채워왔는가가 삶의 가치로 떠오른다.

나는 텃밭에서 이 사실을 배웠다. 싹이 트고 자라서 열매를 맺기까지는 수많은 날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모든 시간은 헛되지 않다.

잡초를 뽑고, 흙을 고르고, 비가 오길 기다리는 그 느린 과정 속에서 삶은 이미 충만하다.

느림은 결과를 미루는 게 아니라, 과정을 삶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이 깨달음은 생산성의 압박에 지쳐 있던 내 마음을 풀어주었다.


더 나아가 느림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바꾼다.

빠른 삶 속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조차 효율성을 요구한다.

휴식조차 ‘재충전’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하지만 느림은 나를 다시 인간으로 돌려놓는다.

잠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것, 바람이 스치는 소리를 가만히 듣는 것,

이는 게으름이 아니라 ‘존재를 긍정하는 행위’다.

나 자신을 수단이 아닌 목적 그 자체로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내 삶은 휴식과 일의 구분을 넘어선 고유한 리듬을 갖게 된다.


느림은 또한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변화를 가져온다.

빠른 사회는 늘 경쟁을 전제로 한다. 누가 먼저 성과를 내는가, 누가 더 앞서 가는가 가 기준이 된다.

그러나 느린 관계 속에서는 ‘함께 있음’이 중요해진다.

누군가와 나란히 걷는 산책길에서 우리는 목적지보다 대화와 침묵의 리듬을 공유한다.

상대를 기다려주는 시간, 불필요해 보이는 우회로조차 관계의 온기를 만들어낸다.

느림은 타인을 향한 가장 근본적인 배려이기도 하다.


이제 나는 느림이야말로 삶의 본질에 가까운 속도라고 생각한다.

게으름은 도피이지만, 느림은 귀환이다. 자기 자신과, 타인과, 세계와의 관계로 돌아가는 귀환.

느림은 무능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온전한 능력이다.

그것은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한 능력이 아니라, 더 깊이 살아가기 위한 능력이다.

도시에서 나는 늘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 부족했던 것은 시간이 아니라 ‘깊이’였다. 시간을 채우는 속도가 아니라, 시간을 살아내는 방식이 문제였다.

느림은 그 답을 알려주었다.

느림은 게으름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가장 성실한 삶의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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